[커버스토리] 돈 구실 할까 '위험한 도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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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부에노스아이레스=주정완 순회특파원]내년부터 유럽 12개국은 단일통화(유로)를 쓴다지만 아르헨티나 국민은 거꾸로 네가지 종류의 화폐를 사용하게 된다.

현재 공식 화폐는 페소화이지만 미 달러화가 아무 불편없이 쓰이고 있으며, 주정부들이 발행한 채권도 화폐처럼 통용되고 있다. 여기에 '아르헨티노'라는 새 돈이 곧 발행될 예정이다.

문제는 경제가 거덜난 상황에서 찍어내는 새 돈이 화폐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다.전문가들은 이 돈이 인플레를 유발하고, 그 결과 시간이 갈수록 돈가치가 떨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 새 돈 왜 찍어내나=지금까지는 '1달러=1페소'원칙에 따라 중앙은행은 보유달러 한도 내에서만 페소화를 발행할 수 있었다. 그런데 경제불안과 함께 달러가 해외로 빠져나가면서 시중의 돈도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국내 소비에 81%나 의존하고 있는 아르헨티나 경제는 더욱 위축돼 갔다.

초긴축정책을 펴왔던 전임 행정부와 달리 임시 정부는 새 화폐를 대량으로 찍어내 시중의 돈부족 현상을 해소할 방침이다. 로돌포 프리제리 신임 재무장관은 "경기회복을 위해선 돈이 잘 돌아야 하는데 아르헨티노가 이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새 화폐 발행규모는 1백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본원통화량이 거의 두배로 늘어난다는 얘기다.아르헨티노는 페소와 같은 법정통화이기 때문에 모든 상거래에 페소화와 똑같이 사용된다고 정부는 설명하고 있다.

◇ 사실상의 평가절하=법정통화라고 하지만 아르헨티노는 은행에서 달러로 교환되지 않는다. 따라서 암시장에서 상당한 웃돈을 얹어줘야 달러로 바꿀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현지 전문가들은 실제 가치가 페소화의 절반에도 못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아르헨티노의 도입은 사실상의 평가절하를 의미하는 것이다.

프리제리 장관도 같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는 새 통화가 경제를 최악의 위기로 몰아넣었던 '1페소=1달러'환율정책으로부터 '질서있게 빠져 나오는 비상구'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결국 페소화를 직접 평가절하할 경우 경제에 미치는 충격이 너무 크기 때문에 이런 편법을 고안해낸 것으로 볼 수 있다.

◇ 인플레는 불가피=돈이 대규모로 풀리는 만큼 물가오름세는 피할 수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아르헨티노는 언제 가치가 폭락할지 모르기 때문에 이 돈을 가진 사람들은 가능한 한 빨리 써버리려 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소비활성화라는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자칫 1989년에 경험했던 5천%의 살인적인 인플레가 재발할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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