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격동의 시절 검사 27년 (1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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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8. 입찰비리 적발

영등포지청에서 인지사건을 전담하던 1971년 11월 어느 날 검사실 구석에 쌓여 있는 내사기록의 증거물 가운데 오래된 신문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투서인지 진정인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취급하던 소위 '영등포구청 수도국'사건 증거물이었다. 다른 일로 바빠 거들떠 볼 시간이 없어 방 한쪽에 놓아둔 것이었다.

내사 요지는 영등포구청 수도국의 수도공사 공개입찰에 부정이 개입돼 있다는 내용이었다. 한동안 주의 깊에 살펴보니 입찰 부속 서류 가운데 신문 공고문과 그 신문 본란에 게재된 기사의 날짜가 다른 것이었다.

지금도 그 기억만은 선명하다. 그 때 신문에 난 기사는 박정희.김대중 후보가 대통령 선거에서 대규모 유세를 하러 다니는 내용이었다. 金후보가 대전에서 유세하는 모습이 기사로 크게 다뤄졌었고 그 아래 광고면에 문제의 입찰 공고를 보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신문 발행일자와 공고문의 날짜가 서로 맞지 않았다.

순간 '이거다' 싶어 수북하게 쌓인 신문 뭉치를 다 뒤적여 보니 신문 발행일과 공고문의 날짜가 다른 것이 아닌가. 형식적으로 입찰 공고를 한 것 같이 입찰 서류를 구비할 목적으로 정상적인 신문을 발행한 뒤 다시 입찰 공고문을 삽입한 신문을 여러 장 찍어낸 것이었다.

문제의 신문은 5.16 혁명 주체이자 당시 실력자인 김종필(金鍾泌)씨의 측근인 石모 사장이 운영하는 H경제일보였다. 곧 신문사 관계자들을 소환조사했지만 너무 명백한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인지 신문사측은 자신들의 행위가 밖으로 알려질까 전전긍긍하는 반응이었다.

당시 수도사업소장은 金모씨였다. 범행을 추궁하니 특정 업체가 수주받을 수 있도록 그런 형식적인 가짜 서류를 만들어 엉터리 입찰관계 서류 일체를 구비해 놓았다는 자백을 받았다. 그러나 대가성 여부나 범행의 구체적 동기는 함구하면서 조사받는 태도가 죄를 지은 사람 같지 않게 건방진 것 같기도 하고 당당하다는 느낌조차 들었다.

수도사업소장 직급은 서기관이었는데 당시 공무원으로서는 상당히 고위직이었다.

그런탓에 서기관을 구속하는 데도 검사장의 승인을 받아야 하던 시절이었다.

강우영(姜友永)지청장과 부장께 수사 상황을 보고했더니 매우 만족해하면서 검사장에게 구속 품신을 올리자고 했다. 구속 품신을 올린 다음날 출근했더니 검사장의 불허 결정이 내려와 있었다.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姜지청장과 부장, 그리고 다른 검사들도 이상하다는 눈치였다. 언론에서도 관심을 가졌던 사건이라 기자들의 문의가 쇄도했다. 나는 기자들의 질문공세가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겠다. 궁금하면 검사장에게 가서 물어 보라"고 대꾸해 버렸다.

지청 간부들은 이 문제를 두고 논의를 거듭하는 것 같았다. 특수수사를 전담한 내 사기 문제도 있었지만 검사장이 일선지청에 구속 불허 결정을 내리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처사였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조선일보 사회면(1971년 11월 17일자)에는 '억대 수도공사부정사건 갑자기 영장보류:영등포 소장 등 4명, 검찰 고위층 지시로'라는 제목의 기사가 크게 실렸다.

순간 '일이 크게 벌어졌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지청 간부들과 이 문제를 상의하던 중 "사건 전말을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검사장이 오해하고 있을테니 기록을 가지고 가서 설명을 드리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건의했다. 부장들도 같은 의견이어서 姜지청장과 나는 기록 뭉치를 들고 검사장실로 갔다.

당시 서울지검과 영등포지청은 8백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지청장이 평검사의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 동행해 주는 것이 무척 고마웠다.

검사장실에는 얼굴이 검고 약간 터프해 일본어로 '구로다이'라는 별명을 가진 김성재(金聖在)검사장과 박종훈 1차장, 서정각 2차장이 앉아 있었고 싸늘한 긴장감마저 느껴졌다.

김경회 <전 한국 형사정책 연구원장>

정리=이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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