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이 땅 위에 평화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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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1994년 동료들과 같이 통일된 독일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물론 우리의 관심사는 그들의 경험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비슷한 질문을 했다. 통일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준비했느냐고.

그런데 그들로부터 들은 대답은 의외였다. 교수든, 목사든, 노동자든 대부분이 통일을 위해 준비한 것은 없었고 통일은 그냥 저절로 온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 독일 통일 저절로 왔을까

이같은 겸손의 정체에 대해 의문점이 풀린 것은 1년 정도 후의 일이었다. 하루는 독일의 한 대학원생이 찾아왔다.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학생에게 왜 독일 사람들이 통일에 대해 그러한 대답들을 하게 됐는지 물어보았다.

그 청년은 한참 생각하더니 어렵사리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자기는 초등학교 시절 독일인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 수치심을 느낀 적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역사교과서에 나온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관한 기록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자기와 마찬가지로 많은 독일인들은 마음속에 죄의식을 느끼고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분단은 과거의 죄 때문에 겪어야 할 숙명 같은 것으로 받아들였고 통일을 당당하게 외칠 입장이 못됐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덧붙였다. 서독 사람들이 동독 사람들을 오랫동안 도와 온 것은 같은 동포인 그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돕고자 하는 순수한 동기 때문이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대답은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가해자의 죄의식 때문에 순수한 동기에서 동포를 돕기 시작한 그들에게는 통일이 왔고, 역사적 피해의식 때문에 밤낮으로 통일을 외쳐대면서도 실제로는 이념을 탓하며 북한 동포들을 돕는 데 인색했던 우리에게는 아직 통일이 오지 않은 역설적 현실이 비교됐던 것이다.

뿌리는 대로 거두는 냉엄한 역사의 법칙이 느껴졌다. 또 우리에게 통일이 오지 않은 것은 그것을 감당할 그릇이 아직 준비돼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원칙도 방향도 없이 혼란스럽게 흘러가는 것만 같은 역사 속에서도 이처럼 인과(因果)의 고리는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남북문제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결과에 이르는 과정일 것이다. 아니 과정이 곧 전부라는 생각이 든다.

2001년이 저물고 있다.증오와 회한으로 가득 찼던 1년,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수많은 탐욕의 그림자에 짓눌려 절망하고 있다. 그러나 길게 보면 그러한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가질 조건들은 많다. 이제 우리는 군부 쿠데타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99.9%의 지지율로 장충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뽑지도 않는다.

28세 난 새파란 벤처기업가가 세상을 흔들어놓고 있지만 최소한 정경유착의 주체가 재벌에서 벤처로, 대통령에서 수석으로 한 단계 내려가는 '발전'을 했다. 이웃 일본은 경제위기가 목전에 임박했다는데 우리는 그래도 4년 전 위기를 치른 '선배'로서 그들보다는 기민하게 변신을 모색하고 있다.

*** 분단.냉전은 위장된 축복

민족분단도 마찬가지다. 냉전종결의 충격이 지난 10여년간 유럽에서 변혁을 몰고 왔다면 이제 앞으로 10년 동안은 그 파도가 동아시아에 밀어닥칠 것이다. 특히 한반도가 변화예상 순위 1위다. 그래서 앞으로 이 땅 위에서 벌어질 변화를 어떻게 관리해나갈 것이냐가 우리 민족의 절대적인 과제다.

분단과 냉전을 극복하는 데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원칙은 평화와 화해협력이다. 만약 그 목표를 달성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우리 민족이 폐쇄적 민족주의와 군비경쟁으로 점철된 동아시아 질서 속에서 평화를 실질적으로 주도해나갈 능력과 위상을 갖추게 됐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래서 한반도를 억누르고 있는 분단과 냉전은 고통이지만 그것은 위장된 축복이며, 우리 민족은 지금 역사 앞에서 시험을 치르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민족과 국가도 빵과 권력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아널드 토인비는 말했다. 모든 역사는 그 껍질을 벗기고 보면 결국 영적(靈的)인 것이라고.

尹永寬(서울대 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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