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들레헴 '쓸쓸한 성탄절'… 연말풍경 사라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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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예수 탄생의 성지 베들레헴에 지나치게 고요한 밤이 찾아왔다."

성탄절을 앞두고 미국 워싱턴 포스트 특파원은 현지 표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15개월째 계속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유혈충돌로 순례자들이 몰리던 연말 풍경이 사라졌다는 말이다.

그는 올해도 베들레헴의 예수탄생 광장에 오색의 성탄 장식이 드리워지고 산타클로스 복장을 한 택시 운전사들이 거리를 누비고 있지만 호텔을 제외한 일반 숙박업소의 대부분이 텅텅 빌 정도로 방문객이 줄었다고 전했다.

이러한 베들레헴의 분위기는 해마다 찾아오던 큰 손님 한명이 오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면서 더욱 차가워졌다. 이스라엘 정부가 세인트 카타리나 교회의 성탄 전야 자정미사로 향하는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의 발길을 막겠다고 23일 발표한 것이다.

아라파트는 1995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이스라엘에서 베들레헴의 통치권을 물려받은 뒤 매년 어김없이 이 미사에 참석해왔다. 이슬람 교도임에도 통치권자가 성탄절에 베들레헴을 방문하는 오랜 전통을 계승하겠다는 뜻이었다. 전세계에 생중계되는 행사여서 홍보효과도 뛰어나다.

이스라엘 정부는 안보각료들의 의결로 결정이 이뤄졌다고 발표했다. 이유는 "테러를 방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뉴욕 타임스는 각료회의에서 "지나친 처사"라는 의견이 쏟아져 나왔지만 아리엘 샤론 총리가 밀어붙여 결국 한 표 차로 통과됐다고 보도했다.

베들레헴에는 3만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살고 있다. 모든 행정권도 팔레스타인측이 쥐고 있다. 그래도 이스라엘이 막는다면 아라파트는 이곳에 갈 방법이 없다.

그가 현재 머물고 있는 라말라에서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은 모두 이스라엘의 통제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타고 다니던 헬기는 지난 3일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부서졌다.

아라파트는 24일 "누구도 나의 의무 이행을 막을 권리가 없다"며 "걸어서라도 베들레헴에 반드시 가겠다. M16 자동소총으로도 나를 막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교황청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라말라에서 베들레헴까지의 거리는 약 20㎞. 72세의 노인인 아라파트가 걷기에는 먼 거리다.

유럽연합(EU)과 미국은 이스라엘에 아라파트의 베들레헴 방문을 허용하라고 촉구했다. 시몬 페레스 외무장관 등 일부 이스라엘 인사들도 샤론 총리의 강경책을 비판하며 이스라엘 내부의 갈등을 표출하기도 했다.

이날 밤 예수탄생 광장에서 열린 성탄축하 음악회에서는 베들레헴 들판의 평화를 기리고 예수의 사랑을 노래하는 찬송가가 울려퍼졌다.

이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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