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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서 본 6·2 지방선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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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지하철 ‘하차(下車) 철새족’을 보면 이번 선거에서 숫자의 중요성이 보인다. 철새족은 자신이 내릴 역이 가까워지면 열차 내에서 우르르 이동을 시작하는데 주로 뒤에서 앞으로 움직인다. 심지어는 같은 객차에서도 앞문으로 내리려고 발버둥 친다. 중국 베이징이나 상하이, 태국의 방콕 지하철에서조차 볼 수 없는 참 한심한 모습이다.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중년이나 노인보다는 젊은 층이 많고 하나같이 이동하면서 승객들의 등이나 어깨를 치고 간다는 것이다. 물론 “미안하다”는 말은 백에 한 명 정도 한다.

철새족들이 움직이는 이유는 짐작한다, 자신들의 목적지에 가까운 출구 부근에 내려 시간을 절약하겠다는 것이다. 좋게 말해 ‘시(時)테크’ 생활관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한 번 생각 좀 해 보자. 지하철 열차는 길어 봐야 200m 정도다. 자신이 탄 객차가 맨 후미라고 해도 그곳에서 내려 맨 앞까지 걸으면 2분이면 족하다. 중간쯤에 탔다면 1분도 안 걸린다. 그런데도 굳이 다른 승객에게 피해를 주며 비집고 돌진(?)하는 이들의 심리 상태는 어떤 걸까. 자율적 사고보다 남이 하는 대로 해야 안심하는 집단적 타율의식으로밖에 설명이 안 된다. 한마디로 ‘난 목우석인(木偶石人)이오’ 하는 것이다. 이들이 투표를 한다면 후보자 선정 기준은 뭐겠는가. 무조건 복잡하지 않고 쉬워야 한다. 공약도 사람됨도 판단을 하려면 사고가 필요하니 남은 것은 숫자뿐이다. 교육감이나 교육의원 후보들이 추첨 숫자 중 1번을 로또에 비유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지하철 노약자석에는 투표 당일 유권자 나들이 심리가 숨어 있다. 출퇴근 시 혼잡한 지하철에도 노약자석이 비어 있는 걸 여러 번 봤는데 세계문화유산에 등록할 만한 한국의 미덕이다. 한데 그 이면에 충(忠)보다 효(孝)를 중시하는 한국의 전통사상이 숨어 있다. ‘국가보다 가정이 먼저’라는 통념인데 노인과 장년을 위하는 게 사회나 국가보다 먼저라는 행위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임진왜란 때 강원도 순찰사 성영(成泳)과 목사 홍효사(洪斅思)가 좋은 예다. 당시 둘은 똑같이 친상(親喪)을 당했으나 행동은 반대였다. 성 순찰사는 조정의 부름을 받아 왜군과 싸웠고, 홍 목사는 기복(忌服)을 위해 피란을 갔다. 훗날 백성들은 ‘효’보다 ‘충’을 앞세운 성영의 행위가 법도에 어긋났다고 비난했다. 투표(국가)보다 나들이(가정)를 중시하는 유전자가 우리에게 있다는 얘기다. 투표 당일 고속도로가 주차장이 되고 운전자 절반이 투표를 안 한 유권자였던 게 지난 네 번의 지방선거였다.

흔히들 지방자치를 ‘민주주의 꽃’이라고 한다. 총선보다, 아니 대선보다 우리 실생활에 중요한 게 지방선거라는 뜻이다. 시장과 구청장의 인허가권을 합하면 무려 6615개에 달한다는 사실(본지 5월 18일 1면)도 확인됐다. 그런데도 선거에 대한 무관심이 팽배한 건 선거 부정이나 후보자 문제만은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국가와 사회, 선거에 대한 유권자 개개인의 타율적 집단심리가 더 큰 원인이다. 우리 사회의 ‘무개념(無槪念)’ ‘무사고(無思考)’ 현상을 타파해야 한다는 얘기다.

최형규 내셔널 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