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 칼럼] 대통령의 아들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월간 종합지인 신동아와 월간조선이 최근호에서 전.현직 대통령 아들과 관련된 흥미로운 기사를 싣고 있다. 신동아는 '문민정부의 황태자'라는 김현철씨를 직접 인터뷰했고, 월간조선은 박정훈 전 민주당 의원의 부인인 김재옥씨를 통해 "김우중 회장이 보낸 돈을 보관했다가 김홍일 의원에게 전달했다"는 충격적인 폭로를 하고 있다.

*** 父子관계 아닌 투사.동지

이 두편의 글을 읽으면서 참으로 착잡하고 부끄러운 심정을 함께 느껴야만 했다. 21세기의 세계화시대에서 우리는 어째서 대통령도 아닌 대통령의 아들 문제로 한 세상을 보내야만 하는가.

이미 5년 전 나라가 떠들썩할만큼 황태자 몸살을 겪었으면 그것으로 족할 일인데, 언필칭 문민.민주정부 시대라면서 대통령의 아들들 때문에 대를 이어 이 나라가 어지럽고 혼란스러워야 하는가. 생각할수록 한심하다는 자괴감(自愧感)이 든다.

군사정권도 아닌 민주정권하에서 어떻게 대통령의 아들이 정치쟁점의 초점이 되는지는 우리의 지난 슬픈 정치사가 말해준다. 막강한 군사정권과 대항해 싸우려면 국민적 지지를 받는 카리스마적 민주투사가 필요했다.

엄혹한 군사정권의 탄압 아래서 이들 지도자의 행동반경은 좁았고 아들들이 핵심 동지와 더불어 비밀요원처럼 아버지 지도자를 도왔을 것이다. 현철씨가 인정하듯 아들 아닌 동지로서, 홍일씨가 부인하지 않듯 늦은 밤 사과상자의 돈을 은밀히 옮기는 일을 거들었을 것이다.

카리스마적 민주투사들이 번갈아 제왕적 대통령이 되면서 동지들은 가신으로, 아들들은 가장 가까운 막료 또는 어드바이저로서 정권에 참여했을 것이다. 평범한 대통령과 아들의 관계가 아닌 투사와 동지로서의 특수한 관계였다는 점에서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 있다.

그러나 이런 형편을 감안하고서도 이해못할 대목이 있다. "1997년 5월 15일 검찰조사를 받으러 가던 날 아침 아버님이 전화로 '미안하다. 내가 아무런 힘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심정이 사도세자를 뒤주에 넣어 죽이는 영조와 비슷하지 않았겠습니까." 현철씨의 회고다.

영조와 사도세자, YS와 현철을 동일선상에 보는 이런 전근대적 발상이 아직도 젊은 정치 지망생에게 남아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현철씨가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듯 그는 아무런 죄가 없었는데 모함에 빠져 정치적 희생양이 돼 사도세자처럼 희생됐다는 이 대목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여러 사정을 감안하고라도 '권력의 가족화'현상이 이미 생겨나 있음을 뜻한다. 아버지 대통령의 권력이 아들에게, 가족에게 흘러들어가고 있다는 권력 사유화현상의 일단이 엿보인다. 그는 97년 당시 한보사건에서는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정치자금 수수와 관련해 특가법상 알선수재와 조세포탈이라는 죄로 구속.복역.사면.복권을 거쳤다.

그는 이런 죄를 모두 부인하고 검찰의 위상 제고를 위한 희생양이었다고 강변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 인사 개입과 권력 농단으로 그를 매도했던 언론이나 재판부, 그리고 국민들은 모두 허깨비에 씌어 그를 사도세자처럼 뒤주에 가둔 것인가. 아니면 권력 농단 자체를 그는 민주시대의 범죄로 보지 못한 탓인가.

'돈냄새 진동'을 폭로한 아내에 뒤이어 남편이 나서서 사과박스는 3개뿐이었고 액수는 많아야 8억 정도라고 축소수정 발표를 했다. 액수가 작아지고 자진 납부라 해서 행위 자체가 정당화되진 않을 것이다.

정치자금에 자유롭지 못한 시대의 공소시효가 지난 일을 왜 다시 들추느냐고 할 수도 있다.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그의 지난 행적을 캐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려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더이상 이런 잘못을, 더이상 권력의 가족화.사유화 현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를 고발하고 경계하자는 것이다.

*** 권력의 가족화 차단해야

대통령 가족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해야 한다는 현철씨 주장은 옳다. 그러나 개인적 사생활을 뛰어넘는 국정 개입과 농단의 흔적이 보이기 때문에 이를 경계하는 것이고 권력의 가족화 현상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엿보이기 때문에 이를 차단하자는 것이다.

영국 총리 부인이 아들 숙제를 위해 관련 공무원에게 전화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지구의 반바퀴를 돌아 우리에게까지 화제가 되는 세계화시대다. '대통령학'보다 '대통령 아들학'이 더 절실하게 필요한 우리 시대의 정치풍토를 끝장내기 위해선 대통령 아들들이여, 제발 정치와 이권에서 손좀 떼도록 해라. 더이상 국민을 부끄럽게 하지 말라.

권영빈 <중앙일보 주필>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