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 초긴축 정책… 민심 폭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당장 먹을 것을 살 돈이 없는데 국제통화기금(IMF)과의 약속이 뭐가 중요하냐."

외신을 타고 들어온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한 시민의 말은 이번 사태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IMF 지원에 목을 매고 있는 정부가 연금 및 임금 삭감 등 초긴축정책을 펴는 바람에 국민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지고 있는 것이다.

◇ 왜 이 지경 됐나=아르헨티나 정부는 이달 초 1인당 예금 인출을 1주일에 2백50달러로 제한했다. 금융기관들이 쓰러지는 상황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부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진 상황에서 이런 조치는 효과 없이 불만만 누적시킬 뿐이었다.

지난 13일 근로자연맹이 주관한 총파업엔 산별노조 대부분이 참가했다. 이 파업의 끝물에 주요 상업도시인 로사리오시에서 몇 차례의 약탈시도 사건이 있었고, 이게 수도 인근으로까지 확산됐다.

현재 아르헨티나 경제는 가사(假死)상태다. 정부 부채가 1천3백20억달러에 달하고 있으며, 4년째 이어지고 있는 경기침체로 실업률은 20%에 육박하고 있다. 여기에다 여소야대로 정쟁은 끊이지 않고 있다.

10년 전 극심한 인플레로 지금과 유사한 비상사태를 맞았던 아르헨티나는 인플레 퇴치를 위해 '1달러=1페소'라는 극단적인 고정환율제를 도입했다.이후 물가 고삐가 잡히고 IMF 지원책이 효험을 발휘하면서 경제가 회생하는 기미를 보였다. 그러나 1997년부터 다시 침체기에 빠지면서 재정위기에 몰렸고 또다시 IMF에 손을 벌려야 했다.

재임 2년이 된 페르난도 데 라 루아 대통령은 IMF 자금을 지원받는 조건으로 아홉번이나 재정긴축 조치를 취했고, 그 여파는 곧바로 근로자와 연금생활자들에게 전달됐다. 국영기업 근로자들의 임금은 올 들어서만 13%나 깎였으며 연금 지급액도 삭감됐다. 현재 3천7백만명의 국민 중 3분의 1이 기본적인 생계마저 어려운 것으로 전해진다.

◇ 디폴트(채무불이행)선언 불가피할 듯=IMF는 아르헨티나가 올해 재정적자 감축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며 이달 중 지원키로 약속했던 13억달러의 제공을 거부하고 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지난달 6백억달러의 채무에 대해 금리를 사실상 일방적으로 낮추는 조치(채권 스와프)를 취했다. 채권자들의 동의를 얻은 것이라고 했지만 채권자들은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다. 유력 신용평가회사들은 이를 두고 사실상의 디폴트라고 지적했다.

이런 가운데 페소화 평가절하 문제가 큰 이슈로 부상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일단 평가절하는 없다고 말한다. 고정환율제로 농산물 수출이 안되는 등 타격이 크지만 이를 포기할 경우 물가폭등으로 국민의 삶은 더욱 도탄에 빠질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산적해 있지만 어느 것 하나 쉽게 풀릴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는 형국이다.

윤창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