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쓴 꼬마일기] 2001년 12월 21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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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3면

지난 일요일 할아버지댁에 갔다. 아주 오랜만에 사촌형도 와서 우리는 신나게 놀았다. 재미있게 노는데 할아버지께서 집 옆에 있는 산에 등산을 가자고 하셨다. 우리는 너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데다 날씨도 추워 정말 가고싶지 않았다.

아빠도 낮잠을 자볼까 하시다가 할아버지 재촉에 준비를 하셨다. 우리가 일어나지 않으니 아빠는 내려오는 길에 우리들에게 팽이를 한개씩 사주시겠다고 하셨다.

우리는 팽이를 생각해 점퍼를 입고 따라나섰다. 동생 기범이도 팽이라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 따라왔다.

우리는 먼저 팽이를 사달라고 해서 팽이를 산 다음에 산 입구에서 힘들다고 하면서 돌아오자고 눈빛으로 서로 계획을 짠 후 아빠에게 먼저 팽이를 사달라고 했다.

그렇지만 아빠는 그렇게 하면 왠지 아빠가 손해보는 일 같다고 나중에 사주겠다고 했다. 아마 우리의 계획을 알아차리신 것 같았다.

추운 날이었지만 할아버지와 아빠,사촌형과 동생이 함께 걸어 올라가는 산은 그렇게 춥지는 않았다. 산길에 솔잎이 수북이 떨어져 카펫을 깐 것처럼 푹신푹신했다. 산 속이라 바람도 덜 불었고 동생 걸음에 맞추려니 아주 천천히 올라갈 수 있었다.

산꼭대기에 올라가니 커다란 정자가 있었는데 그 옆에 가지만 남은 앙상한 나무에 '벚나무'라고 써 있었다. 그런데 동생 기범이는 그 밑에 가더니 "아빠,이거 산꼽데기라고 써 있다"고 하면서 잘난 척을 했다.

꼭대기도 아니고 꼽데기라고 하는 소리에 옆에 있던 다른 아줌마.아저씨들이 크게 웃었다. 형인 내가 너무 창피했다.

그러게 형이 한글 공부 좀 하라고 할 때 할 것이지…. 그래도 무식한 기범이는 창피한 줄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고 해도 산꼽데기라고 벅벅 우기니 무식한 놈이 용감하기까지 하다.

내려오는 길에 문방구에 들러 팽이를 한 개씩 들고 신이 나서 오는데,아빠는 운동을 시켜주고 선물까지 사줘 손해를 봤다고 하셨다. 그렇지만 아빠도 아마 할아버지가 아니었다면 TV나 보고 낮잠이나 주무셨을 것이다.

김지희 <서울 용화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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