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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d&] 낙원동, 숨어있는 맛의 낙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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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1면

사람들은 말한다. 이제 낙원동에는 볼 게 없다고. 맞다. 한때 먹자골목으로 유명했던 낙원동은 이제 그저 낡고 허름한 도심의 뒷골목으로 퇴락했다. 물론 시간을 비껴간 이 낙후된 풍경이 낙원동의 진짜 매력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개량 한옥 사이 골목길을 거닐 수 있고, 옛날식 이발소와 공중전화기 풍경과 맞닥뜨릴 수 있는 이곳이야말로 사람 냄새 나는 곳이라고 항변한다. 그리고 또 있다. 이 오래된 골목의 진짜 매력은 낙원동이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낙원동만의 맛이 있다는 거다. 낙원동의 4미(味). 그래서 우린 오늘도 낙원동에 간다.

글=서정민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고래고기 수육·육회·우네, 뭐로 먹어도 고소해요

치즈 덩어리처럼 생긴 지방층과 쇠고기처럼 보이는 부위를 합한 것이 고래고기 육회, 얼렸다가 얇게 썰어 먹는 부분은 우네다.

고래고기는 어시장에서도 귀하다. 포획이 금지된 때문이다. 경상도 앞바다에 쳐 놓은 그물에 어쩌다 잡힌 고래를 먹을 수 있는 정도다. 그런데 낙원동 ‘홍어랑 고래랑’은 이 귀한 고래 고기를 판다. 원양어선 선장을 지낸 조용찬(49) 사장이 인맥을 총동원해 울산 장생포 등지에서 공수한 것이다. 메뉴는 수육·육회·우네(앞 가슴살) 세 가지다. 끓는 물에 한번 삶은 수육은 날로 먹는 육회와 맛과 질감이 쇠고기를 씹었을 때와 비슷한데 고소함은 훨씬 오래 남는다. 푹 삶아 지방을 쪽 뺀 다음 얼렸다가 얇게 저며 먹는 우네는 고소한 맛의 결정판이다. 평소 담백한 맛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살짝 느끼할 수도 있다. 조 사장은 “한국에서 유통되는 고래 고기는 두 종류”라며 “돌고래 고기는 퀘퀘한 냄새가 나서 먹기 어렵지만 밍크 고래는 잡냄새가 별로 없고 고소하다”고 설명했다. 가격은 수육·육회 3만원, 우네 4만원. 02-744-8961.

껌정갈비탕 검정콩·들깨 넣고 푹 끓였지

뚝배기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껌정갈비탕’.

낙원상가 바로 옆 도로에 있는 ‘이조갈비’에서는 ‘껌정 갈비탕’을 판다. 한 그릇씩 뚝배기에 육수를 넣고 끓일 때마다 검정콩·들깨 가루를 섞기 때문에 국물이 검다. 한호(42) 주방장은 “들깨·검정콩 말고도 10가지 이상의 곡물가루를 함께 갈아 만든다”며 “저렴한 가격(5000원)으로 보양식을 대접하고 싶어서 만든 메뉴”라고 설명했다. 입안 가득 퍼지는 들깨향이 향긋하다. 점심시간에만 70그릇 한정 판매한다. 02-747-7478.

칼국수 그 ‘골목’에 가게는 두 곳, 담백하네

탑골공원 뒤쪽 종로3가 전철역 4번 출구를 빠져나오면 유명한 칼국수 골목이 나온다. 150m 정도의 골목에 칼국수 집은 단 두 곳뿐. 그래도 낙원동 터줏대감들이라 이 골목을 아는 사람들은 칼국수 골목이라고 부른다. 골목 초입의 ‘찬양집(02-743-1384)은 45년째다. 채소와 해물을 푹 끓여 소금으로만 간을 한 해물칼국수(4000원)가 유명하다. 50m쯤 떨어진 곳의 ‘할머니칼국수(02-744-9548)’

감자와 호박을 넣은 칼국수

는 일일이 손으로 반죽을 밀고 칼로 총총히 썰어 면발을 만들기로 소문난 집이다. 이 자리에서만 24년째라고 한다. 이곳에서 만난 이정은(33·서울 홍은동)씨는 “부모님이 옛날 시골에서 해먹던 맛이라며 가끔 찾으셔서 함께 온다”고 말했다. 멸치 물에 감자와 호박을 넣어 만든 국물은 걸쭉한 게 특징이다. 여기에 고춧가루 다진양념을 한 숟가락 넣고 훌훌 마시면 시골 장터에서 먹는 것 같은 칼칼한 손맛이 느껴진다. 4000원.

‘할머니칼국수’의 조순희(56·왼쪽) 사장과 박재순(57) 아주머니가 수제비를 뜨고 있다. 칼국수와 수제비를 함께 먹고 싶다면 ‘칼제비’를 주문하면 된다.

박냉면 박즙 넣은, 쫄깃하고 투명한 면발

‘수영이네’ 박 냉면

할머니칼국수 맞은편 집 ‘수영이네’에서는 ‘박 냉면’을 먹을 수 있다. 밀가루에 전분을 조금만 섞고 물 약간과 박즙을 넣어 반죽을 한 것이 특징이다. 투명한 면발은 일반 냉면보다 얇은데도 쫄깃함은 훨씬 강하다. 얇게 살얼음이 들게 해서 내놓는 고기 육수에 1년 숙성시킨 다진양념을 풀어먹는 박 물냉면은 한여름 열기를 날려버릴 만큼 시원하고 개운하다. 3500원. 02-744-8951.

1500·2000·3000원 … 내용은 실한 밥집들

3000원짜리 백반

낙원상가 옆 세고비아 기타 상점 골목으로 한참을 들어가면 백반 골목이 나온다. 이 골목엔 ‘서울에서 가장 싼 밥집’들이 있다. 가정식 백반을 3000원에 파는 ‘남양식당’ ‘수련집’ ‘부산집’이다. 메뉴는 간단하다. 동태찌개에 김치, 나물, 김, 깎두기 반찬이 전부. 그래도 반찬을 더 달라면 더 주고, 찌개에 들어간 동태 토막도 제법 크다. 이 골목뿐 아니라 낙원동 일대를 돌아보면 2000원짜리 선지해장국·북어 해장국·감자탕·잔치국수를 파는 곳도 있고, 3000원짜리 비빔밥을 파는 곳도 있다. 낙원상가 바로 밑에 있는 식당에서는 1500원짜리 우거지 얼큰탕도 판다. 12년째 영업 중인 부산집의 김씨 아주머니는 “낙원상가로 악기를 사러 오는 가난한 음악가와 탑골공원에서 친구들을 만나 소일거리 하는 노인들이 단골”이라며 “그들의 주머니 사정을 알기 때문에 가격을 올릴 수 없다”고 말했다.

백반골목에선 3000원짜리 백반정식을 먹을 수 있는 집들도 있다.

이들 싼 밥집은 기름때가 잔뜩 낀 벽지를 배경으로 드럼통 테이블과 등받이도 없는 동그란 의자가 늘어져 있다. 1970년대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풍경이지만 인심만큼은 옛날 그 시절의 온기로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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