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위기 열쇠 쥔 ‘휠체어의 원칙론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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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독일 재무장관 입원’.

휠체어를 탄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이 21일(현지시간) 독일 하원에서 유럽안정기금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하원은 이날 7500억 유로 규모의 유럽안정기금 설립을 승인했다. [베를린 로이터=연합뉴스]

유럽 재무장관들이 벨기에 브뤼셀에 모여 7500억 유로 규모의 유럽안정기금을 논의했던 9일 밤. AFP통신은 회담 시작과 함께 뉴스를 타전했다. 27명 중 한 명이 빠졌을 뿐인데 AFP는 ‘긴급’이라고 머리글을 달았다. 약물 알레르기로 응급실에 실려간 이가 볼프강 쇼이블레(68) 독일 재무장관이었기 때문이다.

쇼이블레는 유로의 산증인이자 유럽 위기의 해법을 쥔 인물이다. 유로의 태동에서 최근 위기까지 무대 중앙에서 활동 중인 현역은 그와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정도다. 스트로스칸 총재는 프랑스 재무장관 출신이다. 쇼이블레는 독일 최다선(11선) 의원이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기독민주당 사무총장일 때 그는 당 총재였다.

그에게는 원죄가 있다. 유로존 탄생의 계기는 1990년 독일 통일이다. 나치의 횡포를 잊지 않고 있는 유럽은 덩치가 커진 독일이 달갑지 않았다. 독일도 주변국의 우려가 있는 한 미래가 순탄치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심전심으로 통일 독일을 통합 유럽의 틀 속에 넣는 방안이 논의됐다.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 프랑수아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이 나섰다.

쇼이블레는 16년간 집권한 콜의 오른팔이었다. 내무장관으로 통일협약을 맺었고, 기민당 원내총무와 총재로 일했다. 목표는 연방제 형태의 유럽 합중국이었다. 쉽지 않았다. 영국이 버텼다. 콜과 쇼이블레는 서둘렀다. 차선책을 택했다. 정치 통합은 미루고 경제 통합부터 했다. 그 결과가 99년 유로의 탄생이었다.

그러나 속도에 매달린 대가는 컸다. 정치적 통합이 없는 유로는 위기 때 허둥댔다. 지금이 그렇다. 이젠 해법도 쇼이블레의 손에 있다. 지금까지 유럽에선 독일이 결심해야 대책이 나왔다. 독일의 기조는 명확하다. 돕겠지만 책임은 확실히 묻겠다는 것이다. 그는 파이낸셜 타임스(FT) 인터뷰(20일자)에서 “우리는 유럽을 위해 역할을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이익에 반한다는 것도 분명히 할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이 남유럽을 지원하면 독일도 긴축이 불가피하다. 이미 내년 예산은 초긴축을 전제로 짜고 있다. 앞으로 6년간 매년 100억 유로(약 15조원)씩 감축하는 안이다. 독일 내에선 복지 축소를 우려하는 불만이 터져나오고 있다.

이를 돌파하기 위해 쇼이블레가 든 카드가 금융 규제다. 독일에서 남유럽 지원은 인기 없는 정책이지만 금융 규제는 그 반대다. 불안한 시장을 더 흔들어 놓은 독일의 공매도 금지 조치는 그래서 나왔다. 전략 이전에 지론이기도 하다. 그는 재정위기의 본질은 “실물경제와 금융이 따로 논 것”이라고 진단한다. 그는 “연수익 25%는 기업에선 거의 불가능한데, 이게 금융에선 가능하다는 건 이상한 일”이라고 지적한다.

긴축이 유럽의 경기 침체를 부를 것이란 지적에 대해 그는 “재정적자를 늘리는 게 경제를 살리는 길이냐”고 되묻는다. 대신 고용 확대로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숨가쁘게 달려왔지만 앞으로 유럽이 가야 할 길은 멀다. 확실한 리더십도 필요하다. 쇼이블레는 “영국 없이 프랑스와 독일이 끌고 나가는 게 낫다”고 말한다. 영국이 얼마나 유럽 통합에 부정적이었는지를 그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쇼이블레의 개인사는 순탄치 않았다. 변호사 출신으로 전후 세대 정치인의 선두 주자였던 그는 90년 5월 정신이상자가 쏜 총에 맞아 하반신이 마비됐다. 휠체어에 앉은 그는 “왜 살렸느냐”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불굴의 의지로 재기해 총리 자리 바로 직전까지 갔다. 정치적 대부였던 콜 전 총리의 비자금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여전히 독일 국민은 ‘가장 머리 좋은 정치인’으로 그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공교롭게도 뉴딜 정책으로 대공황을 이겨낸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도 장애인이었다.

김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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