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자축구 역사' 경희대 팀이 사라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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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일 개막하는 전국여자축구선수권대회를 마지막으로 해체될 예정인 경희대 여자축구부의 선수들이 맨땅 경기장에서 훈련에 앞서 몸을 풀고 있다. 수원=김상선 기자

쌀쌀한 11월 마지막날 오후 경희대 수원캠퍼스 훈련구장. 흙먼지 속에서 여자축구선수들이 공을 몰고 달린다.

"수진아, 여기!" "야, 아름아-." 잔디구장 보수 때문에 맨땅에서 뛰고 있지만 부딪치고 넘어지는 장면이 속출한다. 지켜보던 박기봉 감독이 소리친다. "어이, 조심!" 다치지 말라는 지시다. 15명의 선수 중 부상자가 둘. 더 이상 다치면 1일 개막하는 전국여자선수권대회 선발 명단을 짜기도 빠듯하다. 하지만 선수들은 격렬하다. 이번 대회가 사실상의 고별무대라서 더욱 그런 걸까.

"더 달리고 싶은데 어쩔 수 없네요. 서로 격려하면서 팀을 이끌곤 있지만…. 마지막이 될 것 같은 이번 대회를 꼭 우승할 거예요."(골키퍼 송송이.21.3학년)

한국 여자축구의 '원조' 경희대의 여자축구부가 사라진다. 1992년 11월 창단돼 현존하는 대학.실업팀 중 가장 오래된 팀이다. 하지만 지난해 팀 해체를 결정하면서 올해 신입 선수를 안 뽑았다. 22명이던 선수는 현재 15명(4학년 4명, 3학년 5명, 2학년 6명) 뿐. 이제 4학년들이 졸업하면 딱 11명만 남는다. 후보 선수가 단 한명도 없는 미니팀이 되고 마는 것이다.

"비인기 종목인 여자축구 활성화를 위해 어렵사리 운영해 왔지만 이제 더이상 어려워요. 재정여건상 연간 2억원의 지원비를 감당하기가 정말…." 전병관 체육부장(스포츠지도학 교수)이 씁쓸하게 말했다.

그의 말처럼 해체의 가장 큰 이유는 돈이다. 감량 경영 차원에서 23개에 이르는 운동부를 축소하기로 했고, 여자축구부가 해체 1호가 된 것. 문화관광부가 여자축구팀에 3년간 지원하는 국민체육진흥기금(연 5000만원)이 만기가 된 것도 원인 중 하나다.

경희대 여자축구부는 90년대 초 잠깐 존재했던 이화여대(90~93년)와 숙명여대(90~92년)에 이어 창단됐다. 90년 남북통일축구대회가 계기였다. 대회를 성사시킨 정동성 당시 체육부장관이 "다음엔 여자축구도 내보내자"며 모교인 경희대에 창단을 권유했다.

"창단 이듬해 3월 봄철 남녀대학축구연맹전에서 우승했어요. 이명화(서울시청).유영실(INI 스틸) 같은 국가대표 선수도 길러냈지요." 하지만 팬도 관중도 없는 썰렁한 종목에 빠듯한 예산을 쏟아붓기 어려워 99년 한때 해체했다가 재구성되기도 했다.

곡절들을 뒤로 하고 팀은 머지않아 간판을 내린다. 박 감독은 "내년 상반기까지는 끌고가면서 축구를 계속할 3, 4학년 선수들에게 실업팀 스카우트를 주선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고1 때부터 축구만 생각했고 경희대는 내 목표였다"는 주장 이영롱(21.3학년)은 "목표를 이뤄 공을 차는 동안 행복했어요. 실업팀에 들어가더라도 모교가 없어지면 무척 외로울 것 같고, 무엇보다 후배들이 걱정"이라고 말했다. 일부 축구를 포기하는 선수들은 뒤늦게 학업에서 진로를 찾아야 할 형편이다. 드리워진 '비인기'의 그림자가 서러워 보인다.

수원=강혜란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ss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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