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의 여정 김지하의 묵란전' 그곳에 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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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현대와 같은 잡탕 난리 속에서 난(蘭)같이 전아한 수양이 생명력이 있을까? 대답은 거의 부정적이다. 그러나 나는 시도해보고자 한다."

우리 시대 저항의 상징 김지하 시인, 자신의 힘으로 이루기 힘듦을 번연히 알면서도 시도하다 무수한 좌절과 박해를 맛보며 그래도 이만한 세상을 연 그가 이제 난 그림을 가지고 우리 앞에 나섰다.

1963년 한.일 굴욕외교 반대 시위로 투옥되기 시작한 김씨는 69년 반공법 위반, 74년 민청학련 사건 등으로 투옥돼 80년 석방될 때까지 박정희 정권을 저항과 수배, 그리고 투옥으로 보내야했다. 풀려났지만 가장 암울했던 80년도부터 김씨는 난을 치기 시작했다. 그 난들은 수백, 수천장 동료.후배의 손으로 건너가 민주화 운동의 자금이 됐다.

김씨의 난초그림전 '미의 여정, 김지하의 묵란전'이 11일부터 26일까지 서울 인사동 학고재에서 열리고 있다. 그가 공경하는 마음으로 모셔온 '묵란의 미학'을 잡탕 난리 속 같은 시대의 추운 계절에 함께 나누고자 후배들이 마련한 전시회다.

11일 오후 4시부터 열린 개막식에는 문화계를 비롯, 사회 곳곳에서 민주화 운동을 펼치고 있는 1백여명이 모여 김씨의 묵란을 바라보며 당시 낭만적 혁명의 시대, 순정한 마음들을 회고하며 참세상을 기약했다.

민주화 운동가 백기완씨는 김씨의 난초 그림을 '별만이'라고 평했다. "사람들의 눈으로는 무엇을 그렸는지, 좋은지 나쁜지 구별할 수 없고 오직 하늘의 별만이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이라는 것이다. 이에 미술평론가 유홍준씨가 난초 그림의 역사와 김씨 난의 특징과 미학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김지하의 난초 그림이 정말 잘 그린 것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그러나 난초 그림에는 원래 대가가 없다. 난초 그림은 고래로부터 내려온 것 같으나 청나라 정판교(鄭板橋)가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데서 비롯됐다. 중국을 몽고족에게 빼앗긴 한을 난초 그림에 담으며 난 밑에 더부룩한 풀도 그리지 않았다. 김씨의 난초에도 땅은 없다.

난초 그리기가 어려운 것은 만권의 책을 읽은 데서 배어나오는 문자향(文字香)이 있어야 하고, 장인적 수련으로 갖춰진 필력이 있어야 하며, 가슴 속에 간직한 그 무엇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김씨의 난은 표연히 불어오는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난초와 바람을 동시에 장악하고 싶다고 김씨 스스로 밝힌 '표연란(飄然蘭)'인 것이다. 그 바람에는 역사적 인식의 포한(抱恨)이 있다."

작곡가 김영동씨는 손수 만든 옥피리로 김씨의 난을 소리로 그렸다. 원래 '영산회상'을 연주하려 하였으나 손가락이 제 마음대로 놀았다는 김영동씨의 숨 소리와 피리 소리는 하얀 우주의 여백을 율동 있게 휘고 꺾은 김씨 난의 긴 이파리를 그려내고 있었다.

김지하씨는 "향기롭고 고요하고 그윽한 정란(正蘭)으로는 상처투성이의 세상과 혼탁한 본성을 표현할 수 없다. 바람에 흩날리는 것 자체가 혼탁이고 카오스다. 그 속에 시달리며, 그것을 넘어서며 새 질서를 찾기 위해 표연란을 그리고 있다"고 말했다.

전시장에서의 개막 행사는 옆골목 음식점으로 옮겨져 늦도록 계속됐다. 오랜만에 만난 지난 시대 고난과 양심이 한바탕 난.술.말.문화의 굿거리로 이어진 것이다.

▶신경림(시인)=80년대의 난초에 비해 지금 지하의 난초는 많이 부드럽고 편해졌다. 예전에는 뭔가 날서 있고 꼬장꼬장하고 귀기(鬼氣)가 서린듯 했는데 요즘 것은 보기에 우선 편안하다.

▶김지하=80년 원주에 칩거하면서 무위당(无爲堂) 장일순(張壹淳)선생에게 난초 치는 법을 배웠는데 선생님이 난초 그림은 달라는 사람에게는 달라는 대로 다 주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래 되든 안되든 다 주었다. 자꾸만 달라는 데 짜증도 나고, 그러면 술 덜 깬 아침 꼬장꼬장 그려준 그림들도 있기에 그렇게 보일 것이다.

▶김민기(가수.연출가)=그때 받은 지하 형의 난초는 '독립군 군자금'으로 통했지요. 80년대 우후죽순같이 일어선 많은 운동권들이 그 난초를 후원자들에게 팔아 기금으로 만들지 않았습니까. '파리의 택시 운전사' 홍세화씨에게 아마 지하형의 난초가 택시의 밑천이 됐을지도 모르고요.

▶유홍준(미술평론가)=여기 모인 사람들 중 지하 형한테 난초 그림을 받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꼭 그림 옆에는 그 사람에 어울릴 듯한 글을 덧붙이고 있지요.

*** 한땐 '독립군 군자금'노릇

▶김영동(국악인)=우리한테 준 난초 그림만 모아놓았어도 지하 형은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었을 거예요. 나도 난초 그림을 받으며 그렇게 흐뭇하고 떨리는 경험을 맛보았습니다.

▶유홍준=다른 그림들 같이 생존의 작가라도 호당 얼마라고 그림 값이 매겨지지 않은 것이 난초 그림의 특징입니다. 민주화 운동을 돕고 싶고 또 지하 형의 난초를 갖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부르는 게 값이었습니다. 그래 쉽게 그 난들이 민주화운동의 기금이 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지하 형도 이런 저런 단체가 생길 때마다 흔쾌히 난을 몇 점씩 쳐줬고요.

▶신경림=70년대를 산 시인치고 아무도 시가 그렇게 큰 일을 하리라고는 짐작도 못했어. 지하의 담시 '오적'이후 시는 너무 어두워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시대의 등불이 된다는 사실을 일깨움으로써 시를 사회에 많이 읽히게 하고 덕분에 시인들이 인세를 받고 시집을 내는 시대를 열었으니까. 현역 작가의 난초 그림이 돈이 될 수 있는 것뿐 아니라 시가 돈이 될 수도 있는 시대를 연 것이지.

▶김민기=70년대에 지하 형의 시를 가지고 많은 노래들이 만들어졌지요. 그 중 '빈 산'이라는 노래가 수작이었습니다. 80년대 이후에도 지하 시 노래가 많이 만들어졌는데 개인적으로는 70년대 노래와 같은 울림이 없었습니다. '사회주의 관제곡'같이, 마치 탱크가 굴러가는 듯해 거북살스러웠습니다.

▶채희완(춤꾼)=60,70년대는 문화라는 틀 속에서 민주화운동이 이뤄졌습니다. 서툰대로 순정과 낭만으로 일선 정치투쟁으로까지 나갈 수 있었습니다. 80년대는 이슈 중심으로 운동이 전개됐기 때문에 좀더 강렬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문화는 내면화돼 드러나지 않았고 당대의 시급한 문제들만 보여 그렇겠지요.

*** 내 안의 난을 치는 느낌

▶김지하=시대를 이끌 수 있는 문화운동은 필요해. 요즘 나는 내가 너무 큰 것만 잡으려 하지 않았나 반성하고 있어. 일단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하기로 마음 잡았지. 그래서 난도 이제 제법 편안하게 쳐지는 것 같고. 이제는 난초에 끌려다니지 않고 내가 내 속의 난초를 치고 있는 것 같아. 양극, 혼돈과 질서 사이를 왕래하는 과정에서 무슨 한 순간의 빛이 있어 난다운 난이 쳐질 때가 있어. 요즘 문자로 하자면 이것이 '카오스모스'가 아닐까? 이것이 현대와 같은 잡탕 난리 속에서 난같은 전아한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길은 아닐까?

김씨의 회갑연 대신으로 이번 난초 전시회를 열어준 후배들은 연신 "지하 형은 후배복도 많다"고 말했다. 음악.미술.연극.춤.소리꾼 등 문화예술 각 방면에서 중추와 전위로서 활동하고 있는 후배를 두었고 그들 모두 김씨의 난에서 컸다며 '난초굿'은 늦게까지 펼쳐졌다. 그러나 대학 80학번 이후 후배는 한 명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리고 민주화가 진전된 이후 출세한 사람들도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시대의 영원한 반항아요, 전위로 늙어가고 있는 재야(在野)들만이 인사동 허름한 음식점에서 계산 없는 '난굿'을 펼치고 있었다.

이경철 기자

사진=김태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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