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의 붉은 자본가] 중국판 포브스지 발행인 후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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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푸둥 자신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 앞에 선 중국의 ‘부자 박사’ 후룬. 파란 눈의 영국인으로 7개국 언어에 능통하다. [상하이=김경빈 기자]

베이징 자금성(紫禁城) 북쪽에 위치한 공왕부(恭王府). 가장 보존이 잘 된 왕부(황실 저택)로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원래 이 왕부의 첫 소유자는 청나라 건륭제의 총애를 받았던 화신(和珅·1750~99). 당대 최고 부자로 재산이 청나라 한 해 세입의 열 배인 8억 냥에 달했다. 중국의 지난해 세수가 6조 위안이니, 요즘으로 치면 60조 위안(약 9600조원)의 재력가였다.

중국의 부자가 돌아오고 있다. 덩샤오핑이 ‘먼저 부자가 되자(先富起來)’고 외친 지 30여 년 만이다. 공산화 이후 사라졌던 부자들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세계를 놀라게 하는 건 그들의 재산 규모가 아니라 부를 축적해가는 스피드다. 2008년 65명이었던 100억 위안(약 1조6000억원) 이상 자산가는 1년 만에 두 배를 훌쩍 넘어 140명이 됐다.

“중국 부자들은 연 20% 이상 수익을 올려야 정상으로 본다.” 중국에서 ‘부자 박사’로 통하는 후룬(胡潤)의 설명이다. “외국에선 5% 수익도 괜찮다고 보겠지만 중국에서 그 정도로는 어림없다.” 파란 눈의 영국인 후룬이 던지는 중국어는 막힘이 없었다. 그는 1999년 자신의 아이디어를 받아준 포브스와 협력해 중국에서 최초로 부자 랭킹을 매겼다. 이후 매년 ‘후룬 리포트(胡潤 百富)’를 통해 중국의 부자들을 소개 중이다. 2002년부터는 포브스와 결별한 채 독자적으로 리포트를 발표하고 있다. 올 3월 말 상하이 푸둥에 위치한 그의 집무실에서 후룬을 만났다.

● 어떻게 중국 부자 리스트를 작성할 생각을 했는가.

“1997년부터 2년간 상하이 앤더슨 회계사무소에서 근무하며 중국의 빠른 변화에 놀랐다. 이를 외부에 알리고 싶었다. 궁리 끝에 중국의 변화를 이끄는 기업인을 소개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마침 99년 앤더슨 사무소에서 나오게 됐는데 그해가 중국이 건국한 지 50주년 되는 해였다. 그래서 50명의 최고 기업인을 선정, 그들의 이야기를 실었다. 그게 ‘후룬 리포트’의 시작이었다.”

● 중국에선 얼마의 재산이 있어야 부자로 간주되나.

“현재는 1000만 위안(약 16억원)의 재산을 가진 사람을 부자로 친다. 전국적으로 87만5000명이 있다. 1억 위안(약 160억원) 이상 부자는 5만5000명 정도다. 베이징이 9400명으로 가장 많다. 베이징 부자는 인근 지역에서 이주해 온 사람이 많다. 이어 광둥성(8200명), 상하이(7300명) 순이다. 31개 성·시·자치구 중 티베트가 30명으로 가장 적다. 재미있는 건 골프 핸디캡으로 천만 부호인지 억대 부호인지를 대략 알 수 있다는 점이다. 핸디캡 24는 억대 부호, 26은 천만 부호다.”

● 사회주의 중국에서 부자의 역사는 길지 않다. 이들은 어떻게 부를 일궜는가.

“평균적으로 천만위안대 부호는 1970년생, 억대 부호는 66년생이다. 중국 부자들은 대부분 기업가다. 일부를 제외하곤 상당수가 93~94년 창업했다. 부를 일구는 사이클은 크게 네 단계다. 창업 당시 이들은 투자자를 찾을 수 없어 5~6년 동안은 밑바닥에서 뛰며 창업 자본을 모았다. 어느 정도 돈이 모이면 둘째 단계로 기업을 세운다. 셋째는 기업을 크게 키우는 것이고, 넷째는 기업을 팔아 치워 현금화하는 것이다. 요즘은 45세 정도에 조기 은퇴하는 부자가 많다.”

● 중국 부자의 재테크는.

“크게 다섯 분야다. 첫째는 부동산 투자다. 둘째는 골동품, 셋째는 주식, 넷째는 예술품, 다섯째는 각종 펀드를 통하는 경우다. 이 펀드가 최근 중국에서 뜨는 아이템이다. 현재 중국 부자들의 자산은 대부분 부동산과 주식으로 구성돼 있다. 재미있는 건 최근 중국 부자 사이에 티베트 토종개인 ‘짱아오(藏獒)’에 대한 투자 열풍이 불고 있다는 점이다. 짱아오는 티베트 유목민들의 양치기 개로 몸집이 크고 사납다. 최근엔 ‘금에는 가격이 있어도 짱아오엔 가격이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한 마리가 수백만 위안대에 거래되고 있다.”

● 중국 부자들에게서 보여지는 공통된 특질이 있는가.

“성실(誠)과 믿음(信)이 합쳐진 ‘성신(誠信)’이라고 생각된다. ‘될성부른 사람’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성신이다. 내가 아는 푸둥의 한 중국인 기업가는 돈 한 푼 없고 담보도 없이 오직 성실과 믿음으로 정부 관리와 부동산 개발상을 설득해 큰 부자가 됐다.”

● 중국 부자들에 대한 서민들의 반감은 없는가.

“글쎄, 반감이 아니라 어떻게 부자가 됐는지 따라 배우려 하지 않을까. 부는 곧 귀다(富則貴). 귀함은 격조에서 나온다. 격조는 자선행위로 나타나고 있다. 45세의 푸젠성 부자 천파수(陳發樹)는 얼마 전 80억 위안을 기부했다. 우리는 최근 부호 리스트뿐 아니라 누가 자선왕인가를 가리는 자선방(慈善榜)도 발표하고 있다. 기부는 교육과 건강, 재난 분야에 쏠리고 있다.”

● 중국 부자들의 최대 관심 사항은 무엇인가.

“예전에 부호 1세대를 인터뷰할 때 학력을 물어봤지만 대부분 대답을 피했다. 초등학교 졸업이 많았던 것이다. 이들은 자녀 교육에 관심이 많다. 상당수가 유학을 보낸다. 최근 부자들의 관심이 자녀 유학으로 쏠리기에 미국과 영국의 유명 학교를 전문적으로 소개하는 잡지를 발간했다.”

● 앞으로 당신이 발표하는 중국 부자랭킹 1000명 안에 들려면 얼마큼의 재산을 소유해야 하나.

“현재 부자랭킹 1000명의 커트라인은 10억 위안(약 1600억원) 정도다. 해마다 20%씩 재산이 늘어야 1000위 안에 들 것이다.”

상하이=유상철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j 칵테일 >> 이름은 중국인인데 …

후룬은 한마디로 친근한 느낌을 준다. 겸손하고 온화해 사귀기 쉬운 ‘핑이진런(平易近人)’의 인물이다. 후룬(Hu Run)이라는 중국식 이름은 본명 Rupert Hoogewerf에서 R과 H를 따 지었다. 1970년생인 그의 명함에 쓰인 직책은 Chairman & Chief Researcher다. 일주일에 3~4일은 직접 중국 대륙을 발로 뛰며 부자를 조사한다. 영국 더햄 대학(Durham University)에서 중국어를 전공한 그는 88년과 99년 일본과 중국에서 1년씩 유학했다. 영어·독일어·프랑스어·룩셈부르크어·포르투갈어·중국어·일어 등 7개국 언어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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