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Story] 료몬 전문가 도몬 특별기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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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몬 후유지(童門冬二)

일본인들은 왜 사후 143년 만에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를 찾는 걸까. 요즘같이 침체되고 움츠러들 때 일본인은 료마에게서 어떤 리더의 능력을 갈구한 걸까. 첫째로 그는 현대를 사는 일본인에게 필요한 글로컬리즘(글로벌리즘과 로컬리즘의 합성어)을 이미 에도 막부 말기부터 갖추고 있었다. 둘째로 일본인의 나쁜 버릇인 ‘A 아니면 B’라는 양자택일식 사고방식을 ‘A도 B도 섞은’ 이른바 제3의 ‘C’라는 발상으로 만들어냈다. 셋째로 창조성보다는 각색(脚色)적 능력을 발휘했다.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조언을 받아 그걸 한편의 재미있는 ‘드라마’로 만들어냈다.

그는 이를 위해 항상 “상황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한다”는 인식과 ‘자기 변혁’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나 이외에는 모두가 스승이다”라고 하는 겸허한 자세를 계속 유지했다. 더불어 그는 다른 이들에게 ‘료마라면…’이란 생각을 갖게끔 하는 매력이 있었다. 료마의 글로컬리즘 사고방식은 사쿠마 쇼잔(요즘 나가노현인 마쓰시로번(松代藩)의 사상가)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사쿠마는 “나는 스무 살 때 마쓰시로번의 사람이라는 것을, 서른 살 때 일본인임을, 마흔 살 때 세계인임을 깨달았다”라고 했다.

료마는 33년 생애 동안 그 유명한 ‘3단계에 걸친 자기변혁’을 실천했다. 그는 그때그때 “나에게 있어 무엇이 가장 중요한 가치인가”를 자신의 소지품을 통해 친구들에게 표현했다. 처음에는 긴 칼을 찼다. 다음엔 권총을 내보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론 만국공법(국제법)을 보여줬다.

긴 칼의 시대는 료마가 겪은 도사번(土佐藩)의 신분차별 정책에 대한 대응이었다. 무술가가 돼 어떻게든 차별사회에서 벗어나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미국에서 페리가 내항하면서 그의 생각은 한 방에 날아가버린다. 외래 문명의 일본 진출은 료마를 ‘도사번의 사람’에서 ‘일본인’으로 변혁시켰다. 바로 권총의 시대다. 단순히 칼이 권총으로 대체됐다는 ‘무기론’이 아니다. 쇄국에 의해 뒤처진 일본의 과학문명을 빠른 시간 안에 유럽 수준으로 올리자는 생각이었다.

자객들에게 암살당하기 직전인 1867년 하숙집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료마. [더 숲 제공]

이를 료마에게 가르친 사람은 같은 도사 지역 출신의 국방(國防)화가로 불린 가와다 쇼류(河田小龍)다. 가와다는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사정을 철저하게 익혔다. 가와다는 료마에게 “일본도 나라를 열고 적극적으로 외국에 나가야 한다. 난 그런 인재를 양성하고 싶다. 너는 큰 배를 몰고 마음껏 외국을 돌아다녀라”고 말했다. 료마는 나중에 ‘가이엔타이(海援隊)’를 조직해 해외무역에 나서게 된다. 료마의 스승이었던 가쓰 가이슈는 막부(幕府)와 각 번(藩)이 따로따로 갖고 있던 해군을 통일해 ‘일본 해군’을 만들려 했다. 이때 스승인 가쓰는 료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쿠가와 막부는 도쿠가와 가문의 개인적 정부다. 일본국 및 국민의 정부가 아니다. 이것을 일본국, 그리고 일본 국민의 정부로 만들기 위해선 ‘대대적인 개조’를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료마는 그 말을 마음에 새기며 고향의 누나에게 “일본을 한번 깨끗하게 세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편지를 보내게 된다.

료마는 당시 이렇게 생각했다. “일본을 세탁하기 위해선 스스로 심신을 수련해야 한다. 그 수련 방법은 결코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 다른 이들을 위해 살아간다는 입장을 관철하는 것이다. 그냥 책상 앞에 앉아 문자만 만지작거리고 있어선 안 된다. 행동이 가장 중요하다.” 이미 그는 ‘도사번의 사람 료마’가 아니라 ‘일본인 료마’가 돼 있었고, ‘세계인 료마’를 지향하고 있었다.

료마가 체계적인 공부를 했다는 기록은 거의 없다. 전설적인 이야기가 있다. “일본어든, 한문이든, 혹은 네덜란드어로 씌어진 책이든 읽지 않고 그 책을 가만히 노려보기만 해도 료마는 어느 새 그 책의 핵심을 체득했다”는 것이다. 그건 초능력이 아니라 아마도 “일본 글을 배우고 있는 사람에게 그 핵심을, 한문을 계속 배워온 사람에게 그 핵심을, 네덜란드어를 배운 사람에게 그 핵심을”이란 사고방식을 지녔다는 이야기로 해석하는 게 옳다.

그는 아주 영리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항상 ‘일기일회(一期一會)의 만남’을 이어갔다. ‘인생에 있어 지금 이 인물과의 만남이란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것이므로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눈앞의 사람, 상황에 최선을 다하라’는 뜻이었다.

특히 많은 여자가 료마를 사랑한 것은 그의 ‘풍도(風度·풍채와 태도)’와 함께 순수한 나이브(naive)함 때문이었다. “감싸주고 싶다”는 여성의 모성 본능이 발동한 게 아닐까. 료마는 항상 누군가를 즐겁게 해주려는 휴머니즘이 넘쳐났다. 아마 우리가 가장 배워야 할 것은 “누군가를 즐겁게 해주고 싶다”는 료마의 휴머니즘일 수도 있다.

도몬 후유지 자타가 공인하는 일본 내의 사카모토 료마 최고전문가. 82세. 도쿄도청 정책실장을 지낸 뒤 1979년부터 작가활동을 시작했다. 역사적 사실과 현대적 해석을 연결하는 새 경지를 개척해 훈장을 받았다. “역사는 모두 사람의 드라마다. 역사는 ‘사체(死體) 해부’가 아니라 ‘생체 해부’를 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j칵테일 >> 내가 생각해 본 ‘료마의 부활’

대국 일본을 꿈꾼 세계인
최우석 전 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

료마는 현실성 있는 개혁가였다. 무사 출신이지만 무사적 편협성 대신 자유로운 발상을 했다. 대부분의 무사는 번주와 영주 등 윗사람에게만 관심이 있었다. 료마는 그걸 넘어섰다. 작은 영주국이 아니라 일본국이라는 대국을 꿈꿨다. 특히 행동과 실천을 많이 보여줬다. 몇 백년간 적대 관계였던 사쓰마번과 조슈번을 설득하고 연합군을 만들어 막부에 대항하게 해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켰다. 인간미도 있었다. 지금 일본은 방황하고 있다. 사회 통합이 안 되고 비전을 못 찾고 있다. 료마가 비전뿐 아니라 이를 행동으로 옮긴 게 큰 매력일 것이다. 글로벌한 시각이나 행동이 잘 안 되니 료마 같은 지도자를 꿈꾸는 것 같다. 사회의 소통과 통합, 이해와 정파에 구애받지 않고 나랏일을 한다는 것은 우리 정치에도 시사점이 있다.

한국판 료마도 필요하다
이원덕 국민대 교수(일본학 전공)

지난해 민주당 정부가 출범하면서 일본의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안개 정국이고 미래가 안 보이는 상황이다. ‘도요타=일본’이라는 프라이드를 한껏 갖고 있었지만 리콜 문제가 걸리면서 심리적 위기의식을 느끼게 됐다. 정치적·경제적으로도 리더십의 부재에 놓이게 됐다. 료마 같은 리더가 나타나 변화의 패러다임을 주도하고 새로운 비전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인 것이다. 현재의 리더가 없는 데 대한 불안, 위기의식의 방증이다. 료마뿐 아니라 혼다· 마쓰시타 같은 기업의 창업자들도 다시 거론되고 있다. 리더를 뽑는 선거 시스템은 좀 앞서 있지만 우리 사회도 진정한 리더가 있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이다. 희생정신, 책임감, 시대를 앞서 읽는 혜안을 갖춘 ‘한국판 료마’ 역시 필요하다.


최훈 중앙일보 j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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