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농구] '코트의 방랑자' 박규훈, 엑써스서 영원한 둥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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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다음엔 어느 팀으로 갈 건데□"

프로농구 삼보 엑써스의 백업 가드 박규훈(29)은 이제 친구들의 짓궂은 질문에도 낯을 붉히지 않는다.

올해로 프로 4년차의 중견인데도 한 팀에서 두 시즌을 머무른 적이 없는 그를 팬들조차 '떠돌이'라고 부른다. 물론 마음이 편치는 않다.

남은 농구인생마저 떠돌이의 삶으로 기록하고 싶지 않다. 더구나 농구선수에게 서른이란 나이는 이미 선수생활의 중반이 넘어섰음을 의미하지 않는가.

성균관대 졸업 당시만 해도 박선수는 촉망받는 재목이었다. 키(1m78㎝)는 작아도 감각은 당대의 가드 강동희 못지 않다는 칭찬도 받았다. 졸업장을 받기도 전인 1994년 12월 아마추어 최강 기아에 스카우트돼 함께 훈련했고 곧 강동희의 뒤를 받치는 역할을 맡았다.

좋은 시절이었다. 하지만 26개월의 군 생활(상무)을 마치고 프로농구 기아 엔터프라이즈(현 모비스 오토몬스)로 변신한 팀에 돌아와 한 시즌을 보낸 99년 이후 모든 게 달라졌다. 팀에는 자신 말고도 하상윤을 비롯한 백업 멤버들이 즐비했다.

"잠시 나갔다 오라더군요."

팀에서 넘쳐나는 가드 중 그를 임대 형식으로 동양 오리온스에 보낸 것이다. 약속은 있었다.1년 후 다시 불러들이겠다는 말을 믿고 열심히 뛰었다.

99~2000시즌 오리온스 유니폼을 입고 24경기에 출전, 경기당 15분24초를 뛰며 3.2득점.2.5어시스트.2리바운드를 기록했다. 식스맨으로서는 훌륭한 기록이었다.

약속한 1년이 됐고 박선수는 지난해 5월 엔터프라이즈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본가'에선 그에게 다시 1년의 '외유'를 권했다. 차라리 정식 트레이드를 해달라고 사정했지만 박선수가 언젠가는 필요하다고 본 팀은 임대계약만을 고집했다.

"막막했죠. 힘도 빠지고요. 지난해 6월 결혼까지 했잖아요. 그런데 이팀 저팀으로 임대되는 신세라니…."

또 참아야 했다. 아직은 농구인생을 접기엔 너무 젊었기에 이를 악물었다. 결혼 직후 그는 신세기 빅스(현 SK 빅스) 훈련장으로 향했다.

억울하기도 하고 꼭 뭔가를 보여주겠다는 각오도 함께 가지고 갔다. 그곳에서 뜻밖의 수확도 얻었다. 명가드 출신인 빅스의 유재학 감독이 그에게 가드로서의 시야와 게임 조율능력을 전수해준 것이다.

역시 벤치멤버였지만 팀에 없어서는 안될 식스맨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팀 성적이 전년도 최하위에서 5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1년이 또 지난 올 5월 다시 본가를 찾았다. 자리는 없었고 짧은 통보를 받았다. "이제 가고싶은 곳으로 가라."

2년이나 임대 선수생활을 하며 버틴 결과 치곤 너무 간단했다. 섭섭하기보다 맥이 풀렸다.

"'실력만 더 뛰어났더라도'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가드진을 보강하려는 팀들이 손짓을 했다. 그의 결정 기준은 명확했다.

"포인트 가드잖아요. 그렇다면 그 부분이 상대적으로 약한 팀을 선택해야 많은 기회가 주어질거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신기성이 군 입대로 빠진 엑써스를 선택했다. 지난 6월 엑써스와 2년간 정식 계약을 하고 9월에는 집을 경기도 용인시 수지에서 팀 연고지인 원주로 옮겼다. '정착'하고 싶어서였다.

"눈빛만으로 손발이 맞는 팀플레이를 해보고 싶습니다."

그에게 드디어 2년의 안정된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2년이 3년이 될지 4년이 될지는 그가 하기에 달렸다.박선수는 말한다.

"먼저 팀이 잘 돼야죠. 오랜 꿈을 이뤘으니 그걸 지켜야지요."

엑써스의 김동욱 감독도 그에게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김감독은 "장기 레이스에서는 식스맨의 활약이 반드시 필요하다. 포인트 가드가 김승기 한명뿐인 우리 팀에는 박규훈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코트의 떠돌이 박규훈.

마침내 그는 원하던 '안정'을 찾았고 상처받은 농구인생을 치유할 기회를 잡았다. 그가 2년 동안 공들여 지을 새 둥지가 얼마나 튼튼하고 아름다울지 기대가 크다.

문병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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