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우리 가락 지켜낸 '마지막 남사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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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지난 10일 90세를 일기로 타계한 송순갑(宋淳甲.대전시 무형문화재 1호.사진)옹은 웃다리 농악의 일인자였다.

웃다리 농악은 인사굿.돌림 벅구.당산 벌림.무동쾌자 놀이 등 19개 판재로 이뤄지는 농악이다. 일제 시대를 거치며 맥이 끊길 위기에 처했으나 고인에 의해 명맥이 이어졌다.

고인의 빈소가 마련된 충남대병원 영안실에는 10, 11일 전국의 내로라하는 예인(藝人) 1백여명이 몰려들었다.

이날 서울에서 급히 달려온 사물놀이의 대가인 김덕수(金德洙.49)씨는 "이 시대의 마지막 남사당(男寺黨)이신 선생님이 돌아가셔서 전통 농악이 제대로 계승될지 걱정스럽다"며 애도했다.

宋옹의 인생 역정은 고단하고 외로웠다. 하지만 그는 우리나라 전통 예술을 지키기 위해 열정을 쏟았다.

그는 1911년 은산 별신굿으로 유명한 충남 부여군 은산면 신대리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하지만 태어난 지 20일 만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4세 때는 아버지마저 잃는 슬픔을 맛봐야 했다.

宋옹은 일곱살 때 마을에 들어온 걸립패에 부탁해 새미역(무동타기)을 배우면서 농악에 본격적으로 빠져들어 타고난 재기를 발휘했다. 여덟살 때 경남 진주의 이우문 솟대패 등에서 땅재주(살판)를 배웠다. 열한살 때부터 8년간 김승서씨에게서 박첨지 놀이(인형극)를 배우는 등 땅재주.소고.장고.상쇠 등을 익혔다. 스무살 때는 남사당의 후신인 '박옥협 협률패'에서 활동했다.

그는 50년 당시 처가가 있던 대전에 정착해 빼어난 장구 실력을 발휘해 '송장구'라는 별명을 얻었다. 59년에는 서울 덕수궁에서 남사당 재창단 공연을 벌여 상쇠로서 기량을 한껏 뽐냈다. 이듬해 그는 대전중앙농악회를 만들었다.

고인은 전국농악경연대회.전주대사습놀이 등에서 장원을 차지하는 등 쟁쟁한 전국대회에서 80여차례 입상, 웃다리 농악의 1인자로 자리매김했다.

후진을 양성하는 데도 힘을 쏟아 대전 출신의 사물놀이 대가인 김덕수씨와 이광수씨 등에게 장구.쇠가락 등을 가르쳤다.

제자들은 "선생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생한 때문인지 생활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걸립패를 조직해 양로원 등을 수시로 찾아 위문공연을 하는 등 따스한 정을 나누었다"고 말했다. 고인은 말년까지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86세 때엔 중앙농악회를 발전시켜 대전웃다리농악보존회를 설립했다.

고인의 뜻을 계승해 웃다리농악보존회장을 맡고 있는 아들 덕수(德守.43)씨는 "아버님은 돌아가시기 이틀 전까지만 해도 농악의 앞날을 걱정하시며 '원로들을 잘 모셔라'고 당부하셨다"고 말했다. 발인은 오는 14일 오전 10시. 장례는 웃다리농악보존회장으로 치른다. 042-257-3587.

대전=최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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