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담배에 연하애인…커져가는 캠퍼스 내 우먼 파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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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9면

'캠퍼스 여인천하(女人天下)'.

대학 내 여학생 파워가 거세다. 여자총학생회장이 등장한 것은 물론 음주문화.연애 등에서 주도권을 잡는 등 대학문화의 변화를 이끌고 있다. 공학부.법학부.경영학과 등 전통적인 '남성영역'에 뛰어드는 여학생 비율도 높아졌다.

2001학번 여학생 비율은 서울대 경영학과가 31%, 고려대 법학과가 29%, 연세대 의예과가 30%에 이르고 있다.

이제 '남성천하'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올해 대학에 들어가 주눅들지 않고 당당하게 대학생활을 만끽하고 있는 여대생 네사람을 통해 여학생 주도로 변해가는 캠퍼스 문화를 엿보았다.

고려대 법학과 주은영, 서울대 경영학과 김나연, 연세대 의예과 김희진.한국과학기술원(KAIST) 공학부 양연정양 등이 그들이다.

▶커져가는 캠퍼스 내 여성파워=최근 수년간 대학가의 주요 이슈 가운데 하나는 교내 성(性)평등과 여학생들의 권리신장. 여학생들의 비율이 높아지고 여권신장의 사회적 분위기가 맞물린 결과다. 학교별로 여학생위원회 등이 생겨나 총학생회 못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지난 9월 정기 고.연전 때 고려대 여학생위원회가 기존 고.연전이 남성 중심 문화로 점철돼 있다며 여학생과 장애학생 들을 위한 '안티 고.연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고려대 주은영양은 "올해 총학생회장에 법대 여학생이 당선되는 등 교내에서 여학생의 영향력이 눈에 띄게 커졌다"고 말했다.

한두달이 멀다 하고 캠퍼스에 성희롱 사과 대자보가 붙는 것도 이같은 분위기를 반영하는 현상이다. 과거 교내에서 성희롱을 당해도 침묵하던 여학생들이 이제는 여학생 자치기구인 여학생위원회 등에 고발, 가해 남학생의 사과를 받아내고 있는 것.

서울대 김나연양은 "남자선배들이 이제는 여자후배에겐 농담도 마음편히 못하겠다며 불평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여학생이 바꿔가는 대학문화=선배들의 술 공세에 후배들이 인사불성되기 일쑤였던 과.동아리 모임. 요즘 대학가에선 그런 모습을 찾기 힘들다. 여학생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대학생들의 음주.놀이 문화가 바뀌어가고 있다.

"맥주바에서 칵테일 한잔 하면서 선배들과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기회가 늘었어요. 주량껏, 개성대로 마시는 게 좋잖아요." KAIST 양연정양의 말이다. 여학생이 교내에서 담배를 물고 활보하는 모습도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연세대 김희진양은 "'길담배'를 피우는 여학생들이 주위에 많다"며 "1980년대에는 여학생이 교내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복학생 선배에게 따귀를 맞았다는 말을 선배에게 듣고는 아연실색했다"고 말했다.

과거 복학생들이 도서관 건물 구석에서 즐겨하던 '팩차기(접은 우유팩으로 제기를 차는 놀이)가 여학생들 사이에서도 인기다. 서울대 김나연양은 "공강시간에 남녀학생들이 함께 팩차기를 한다"며 "남자보다 현란한 기술을 구사하는 여학생들도 많다"고 말했다.

▶연하 남학생 사귀기 붐=Y대 인문학부 3학년에 재학 중인 金모(21)양은 2년 연하의 동아리 후배인 朴모(19)군와 열애 중. 신입생 환영회에서 박군을 보고 첫눈에 반한 金양은 곧바로 핸드폰 문자메시지로 사귀자는 제의를 했다.

그러나 주위에선 아무도 남자후배와 교제하는 金양을 이상한 눈으로 보지 않는다고 연세대 김희진양은 전한다.

고려대 주은영양은 "예전에는 복학생들이 저학년 여학생과 사귀면 주변의 부러움을 샀다지만 요즘은 연하의 남학생과 사귀는 여자 선배들이 부러움의 대상"이라고 말했다.

서울대 김나연양은 "소개팅 후 남자의 애프터 신청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건 1980년대 얘기고 요즘 여대생들은 먼저 전화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여성학 과목 인기폭발=최근 대학가에는 성(性).남녀평등.여성의 사회진출 등과 관련한 과목들이 인기를 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학생들을 위한 다이어트 관련 강의까지 등장했다.

고려대 주은영양은 "이런 과목들은 수강신청이 시작되자마자 곧바로 마감되고 캠퍼스 커플들이 함께 강의를 듣기도 한다"고 말했다.

늘어나는 여학생들을 위한 교내 시설도 눈에 띄게 개선되고 있다. KAIST의 양연정양은 "요즘에는 학교측에서 여학생 기숙사에 더 많은 신경을 써줘 남학생 기숙사에는 오래된 철제 침대가 있는 반면 여학생 기숙사는 깨끗한 원목침대가 갖춰져 있다"고 말했다.

▶남녀차별의 벽을 깨자=대학 내에서 '여학생 파워'가 커지긴 했지만 취업.진학시 두꺼운 남녀차별의 벽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 이들 여학생의 공통된 얘기다.

연세대 김희진양은 "여학생들은 성적이 최상위권에 들어도 일부 전공에서는 남학생을 선호하는 벽에 부닥친다"고 말했다.

"토목과에 다니는 한 여자선배가 여자에 대한 편견 때문에 성전환 수술이라도 받고 싶은 심정이라고 하소연할 때 마음이 무거워진다"는 게 KAIST 양연정양의 하소연.

하지만 이들은 미래에의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고려대 주은영양의 꿈은 모교의 여자 법대 교수 1호가 되는 것. 공인회계사를 지망하는 서울대 김나연양은 "실력으로 정면승부하겠다는 여학생들이 늘고 있는 만큼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도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KAIST 양연정양은 "과학고에 진학할 때부터 공학도가 되기로 결심한 이상 여학생들이 버텨내기 힘들다는 전기전자공학을 전공하고 싶다"는 당찬 포부를 밝혔다.

이들은 또 여자 수험생들에게 "학과를 선택할 때 남학생들이 많은 과라고 해서 피하지 말고 소신을 갖고 당당하게 지원하라"는 충고를 덧붙였다.

정리=정현목.김현경 기자

사진=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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