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큰 도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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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이 어느날 친구인 화가 제임스 휘슬러의 집을 찾았다. 작품을 둘러보던 마크 트웨인이 물감이 채 마르지도 않은 그림 하나를 만지려 들자 휘슬러가 놀란 듯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자 마크 트웨인이 천연덕스럽게 내뱉은 한마디."괜찮아. 난 장갑을 끼었거든."

채 마르지도 않은 자신의 작품을 걱정하는 화가에게 오히려 물감이 묻을 자신의 손가락을 걱정하는 대중도 있음을 일깨워준 마크 트웨인의 익살을 훗날 휘슬러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대중에게 되돌려줬다.

1872년 휘슬러는 '화가의 어머니'란 제목으로 초상화를 그리면서 '회색과 검은색의 배열 No.1'이란 제명을 나란히 붙였다. 자신의 작품을 단순히 화가의 어머니를 그린 초상화로 보기보다 네모난 형체에 회색과 검은색이 배열된 추상 작품으로 보아 달라는 익살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낯설게 보일 때 작가는 비로소 자유로운 형상을 만들 수 있다"고 파블로 피카소는 말했다. 예술에서 작가의 고유한 관점과 자유로운 발상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99%의 대중이 갖는 평범한 눈을 거부하고 1%의 자기 눈을 고집하지 않았던들 그가 20세기 미술사에 획을 그은 위대한 인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을까. 대중의 허를 찌르는 역발상이 비단 예술가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상자를 열고 자루를 뒤지며 궤짝을 들추는 도둑을 막기 위해서는 끈으로 잡아매거나 빗장이나 자물쇠로 단단히 채우면 된다. 이것을 세상의 지혜라고 한다. 그러나 큰 도둑은 오히려 궤짝을 지고 상자를 들고 자루를 메고 달아나면서 노끈이나 자물쇠가 실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2천5백년 전 장자(莊子)가 한 말이다.

엊그제 지방에 있는 한 금융기관에서 수천만원이 든 금고가 통째로 없어지는 도난사고가 발생했다는 소식이다. 무인 경비시스템을 망가뜨린 뒤 들어가 철제금고를 안고 유유히 사라졌을 것으로 경찰은 추정하고 있다. 무인 경비시스템과 금고 자물쇠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되레 도난의 표적으로 이용했으니 이만하면 좀도둑 수준은 면한 셈이다.

작은 것이라도 도둑맞지 않겠다고 자물쇠를 채우고 경보장치를 설치하며 조심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지혜다. 그러나 저 위에서 이것을 내려다보며 비웃고 있는 진짜 큰 도둑들은 따로 있는지 모르겠다. 웃는 낯으로 부드럽게 다가와 우리도 모르는 새 우리 것을 훔쳐가고 있는지도….

배명복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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