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엔론 파산 후 보험 · 해운 · 은행계 휘청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3면

1년 전만 해도 85달러에 달했던 엔론의 주가는 지난 주말 26센트로 곤두박질했다. 주식이 거의 휴지조각으로 변한 셈이다.

그 결과 8백억달러를 웃돌던 주식 시가총액이 1억9천만달러로 쪼그라들었다. 덩치도 엄청나고 사업전망도 밝다던 엔론이 어떻게 이 지경이 됐을까.

엔론의 몰락은 한국식 부실기업의 붕괴를 보는 듯하다. 핵심사업과는 무관한 기업 인수, 편법적인 자금 조달, 분식회계를 통한 이익 부풀리기, 경영진의 도덕적 해이 등이 합작해 빚어낸 사태였던 것이다. 이런 사례는 기업에 대한 감시가 철저한 미국에선 아주 드문 일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초대형 기업의 붕괴에 따른 파장이 크게 번져나갈 기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 에너지.금융 등으로 충격파=엔론은 미국 및 유럽 에너지거래 시장의 20%를 장악하고 있다. 세계 최대다. 이런 기업이 파산함에 따라 캘리포니아 전력난에 이은 제2의 에너지 위기가 올 수도 있다고 월 스트리트 저널이 2일 보도했다.

엔론은 또 에너지 거래에서 쌓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석탄.펄프.종이.플라스틱.금속.광섬유 등 상품거래 시장에서도 선두를 달려왔다. 이에 따라 에너지 뿐 아니라 보험.은행.해운.금융서비스산업도 큰 타격이 예상된다.

엔론은 2일 법정관리 신청서를 통해 시티은행(30억달러).뉴욕은행(24억5천만달러).JP모건체이스은행(19억1천만달러)등 총 1백31억달러의 채무가 있다고 밝혔다.

프랑스의 크레디 리요네은행.독일의 도이체방크.일본의 닛코증권도 엔론 채권에 거액을 투자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여기에는 본사 부채를 웃도는 계열사 부채는 포함되어 있지 않아 피해액은 훨씬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보험업계는 엔론 부도로 20억달러의 추가 손실이 예상된다고 모건 스탠리의 보험분석가인 앨리스 슈로더는 추정하고 있다.엔론이 에너지 선물을 거래하며 이 계약을 보증했던 보험사들이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유력 신용평가회사 S&P는 엔론과 관련된 파생상품 규모가 63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해운 파생상품시장을 지배해온 엔론의 파산으로 관련 해운회사들도 위기에 몰릴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밖에 엔론의 회계법인이었던 아더 앤더슨과 엔론의 부당 내부거래에도 불구하고 기업 신용등급을 BBB+로 유지했던 피치와 S&P 등 신용평가회사들의 이미지 훼손도 예상된다.

아더 앤더슨은 현재 엔론 이사회와 증권거래위원회(SEC)로부터 회계장부 조작과 관련한 조사를 받고 있다.

◇ 거대한 부실 덩어리 엔론=불과 몇달전만 해도 엔론은 제너럴 일렉트릭(GE)이나 마이크로소프트(MS).월마트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유망기업으로 통했다.

지난 10월 회사측은 중대 발표를 했다.앤드루 파스토 전 최고재무책임자(CFO)가 자산운용업체 LJM2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12억달러의 손실을 봤다고 밝힌 것이다. 파스토우가 이 기업을 비싸게 사 주는 대신 LJM2로부터 3천만달러 이상을 챙긴 것으로 드러났다.

11월 초에는 계열사들을 망라한 연결 재무제표가 공개됐다. 분식회계 사실이 들통나는 순간이었다. 지난 5년간 순익을 5억8천6백만달러나 부풀렸고, 부채는 6억2천8백만달러 감춘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달 다이너지가 엔론 인수에 나서며 실사를 벌인 결과 1주일 만에 6억9천만달러의 추가 부채가 발견됐다.

이에 다이너지는 더 이상 엔론 인수를 추진할 수 없다고 발을 뺐다.엔론은 법정관리를 신청하면서 계열사를 포함한 총부채가 3백12억달러에 이른다고 밝혔다.

정재홍.홍수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