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배씨 시집 '부론에서 길을 잃다' 펴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석포리 가는 길은 바람길이다/바람이 길을 내고 길은/바람 속을 흔들리며 간다/서해가 내륙 깊숙이 찌르고 들어와/비수로 박힌 석포 들판, 이미 많은 길들에/사타구니를 열어주었으니 길이/다른 길을 달고 달아나 석포리의 길은 늘/바다의 날카로운 끝에 선다 바람 속의 길은/위태로운 칼날 위에서 잠들었으므로/바다를 가두던 가슴 속 출혈은 멈추지 않는다"

한 해도 이제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다.텅 빈 하늘과 계절,그리고 마음 자리를 그대로 채워넣어도 좋을 속이 꽉찬 시들이 삶의 결실처럼 나오는 계절이기도 하다.

김윤배(57) 시인이 최근 펴낸 시집 『부론에서 길을 잃다』(문학과지성사.5천원)는 소멸의 계절과 시간을 아프게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삶의 아름다운 깊이로 승화시키고 있다.

1986년 『세계의문학』을 통해 시단에 나온 김씨는『굴욕은 아름답다』등의 시집을 펴내며 이웃의 삶과 자연 풍광 등의 인상적 묘사를 통해 삶의 깊이를 곧바로 파고들게 하고 있다.

이번 시집에서도 위 시 '석포리 가는 길'일부에서와 같이 내륙 깊숙이 바닷물이 치고 들어온 서해안 들판을 '사타구니를 열어주었다'는 식으로 사실적.인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곧바로 그 풍경은 '가슴 속 출혈'이 되어 시인의,우리들 삶의 내면으로 들어온다.

"바다는 달빛을 향해/꿈틀거리는 힘으로/제 몸 밀어올리고/제 몸 끌어내린다/밀어올림과 끌어내림 사이에/깊은 잠 같은 시간이 고여 있다/시간은 해변에 깔려 있는/조약돌 사이에 소리 없이 스민다/고여 있는 시간의 소멸을/나는 고통 없이 지켜본다/저 고여 있는 시간의 삼투 속에/내 생의 상처받은 시간들이 따라 스민다/상처받은 시간이 빠져나간 헐렁한 몸으로/나는 달빛 안는다/달빛이 나를 삼투한다/"('안면도 시편'일부)

달 밝은 밤 시인은 안면도 바닷가에 앉아 오래도록 밀려 오고 쓸려 가는 파도가 해변의 조약돌에 스미었다 빠져나가는 것을 바라보며 시간과 삶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파도의 일렁임, 밀물과 썰물의 살아 있는 시간이 있고 바로 그 잠깐 사이의 고여 있는, 영원의 시간도 있다. 파도를 일렁이며 시간을 주재하는 것은 달빛이고 그 달빛은 시인에게 삼투한다. 그래 시인은 달빛, 삼라만상, 그 운행의 주재자와 일체가 된다. 김씨의 이번 시집에 실린 좋은 시들에서는 이런 우주적 시각에서 본 삶의 깊은 내면 풍경이 인상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몇년째 죽음에 이르는 병마와 싸우고 있는 원로시인 이형기(68)씨도 최근 나온 『문학동네』겨울호에 신작시 3편을 발표했다.49년 『문예』를 통해 등단, 반세기 동안 서정.감각.현실.사상.문명 등을 아우르는 긴장된 시적 편력을 해온 이씨의 이번 시들은 시적 긴장을 훌쩍 뛰어넘은 무애(無碍)의 시세계를 펼치고 있다.

"눈을 감으면/아득한 기억의 저쪽에서/하얗게 떠오르는 것이 있다/보니 그것은/여태까지 내가 수없이 입밖에 내었던/그리고 또/입 안에서 이리저리 굴리다가/꿀꺽 삼켜버린 말들이다/원래는 색깔과 모양과 의미가 있었던/그것들이 이제는 그저 하얗다/만들어진 모든 것은/필경 사그라져버린다는 뜻인가/그러나 다시 보면/그것은 싸락눈이 깔린 언덕이다/봄이 되어 그 눈이 녹으면/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날/그리하여 새로 시작할 그 자리/소멸과 생성이/둘이면서 하나인 모순의 자리가/바로 거기 있구나"('모순의 자리'전문)

삶과 현실과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모순을 극복하려 시인은 긴장된 시들을 써왔다. 그러나 이제 되돌아보니 '색깔과 모양과 의미'로 존재와 모순을 증명하려 했던 그런 시마저 빛바랜 것이 되었다.

그래도 시는 무용지물이 아니라 '둘이면서 하나인 모순의 자리', 그 불이문(不二門), 구원의 세계 입구에 이르게 하는 길이다. 순수시든, 참여시든, 실험시든 모든 좋은 시들은 궁극적으로는 피나는 구도의 길을 따라 구원의 세계로 나아간다.

그런 구도의 험난한 도정도 없이 구원의 세계를 펼치려는 설익은 가짜시들이 많아 더 춥고 공허한 시절이기에 두 시인의 신작시들은 더욱 값지다.

이경철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