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자크 프레베르 '가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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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안동 도산서원 쪽을 가다가

와룡면 어느 과수원을 보았다.

사과나무에 사과가 가지가 휘어지게 열려

이 세상의 가장 좋은 경치를 펼치고 있고,

아울러 미칠 것 같은 가을 날씨가

금방 떨어질 듯이

아까움이 꽉 찬 채로 매달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과수원을 지키는 사람도 없고

울타리도 없고

길 가던 사람은 자기의 길만 가고

이렇게 내놓으면 도둑도 없는 것인가.

제일 흔한 도둑 마음은 어디로 귀양가고

옛날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하마 들릴 그 착각 속을

꿰뚫을 작정인가

직행버스가 전면을 달렸다.

-박재삼(1933~97) '어떤 여수'

가을이 가고 나면 우리들 마음 속에 한 장의 고요한 백지가 깔린다. 거기에 우리도 나무를 심자. 나무마다 '아까움이 꽉 찬' 사과를 가지가 휘어지게 매달아보자. 삭은 나무 판때기에 '와룡면'이라 쓴 표지판도 달고 무엇보다 고요한 하늘을 아주 넓게 비워 그 유토피아의 그림을 마음에 높이 걸어두자. 여기까지는 어떻게 시인의 흉내를 내겠는데, 전면을 꿰뚫고 달리는 '직행버스'의 액센트를 어떻게 찍나. 야, 단수 한번 높구나!

김화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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