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도산서원 쪽을 가다가
와룡면 어느 과수원을 보았다.
사과나무에 사과가 가지가 휘어지게 열려
이 세상의 가장 좋은 경치를 펼치고 있고,
아울러 미칠 것 같은 가을 날씨가
금방 떨어질 듯이
아까움이 꽉 찬 채로 매달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과수원을 지키는 사람도 없고
울타리도 없고
길 가던 사람은 자기의 길만 가고
이렇게 내놓으면 도둑도 없는 것인가.
제일 흔한 도둑 마음은 어디로 귀양가고
옛날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하마 들릴 그 착각 속을
꿰뚫을 작정인가
직행버스가 전면을 달렸다.
-박재삼(1933~97) '어떤 여수'
가을이 가고 나면 우리들 마음 속에 한 장의 고요한 백지가 깔린다. 거기에 우리도 나무를 심자. 나무마다 '아까움이 꽉 찬' 사과를 가지가 휘어지게 매달아보자. 삭은 나무 판때기에 '와룡면'이라 쓴 표지판도 달고 무엇보다 고요한 하늘을 아주 넓게 비워 그 유토피아의 그림을 마음에 높이 걸어두자. 여기까지는 어떻게 시인의 흉내를 내겠는데, 전면을 꿰뚫고 달리는 '직행버스'의 액센트를 어떻게 찍나. 야, 단수 한번 높구나!
김화영 <시인>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