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정재 "서른 즈음… 마음이 시려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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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5면

서른, 마흔, 쉰. 열살 단위로 끊어지는 나이의 문턱에서 사람들은 잠시 주춤한다.

어차피 숫자놀음이건만 세밑에 부는 바람에 속살보다 마음이 더 시린 건 늘 수수께끼다. 겨울의 초입, 대학로에서 만난 이정재와의 데이트. 여성 네티즌들이 겨울과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라고 생각한다는 그이지만 나이 얘기가 먼저 나왔다. 그는 다음달 생일이 지나면 우리 나이로 서른이 된다고 했다.

"저 요즘 술 마시고 노래방 가면 '서른 즈음에' 자주 불러요." 서른을 목전에 둔 그에게 '이정재에게 일어난 올해의 사건'이 있으면 꼽아달라고 했다."'젊은 남자' 찍고 7년 만에 배창호 감독님과 '흑수선' 작업한 게 제일 큰 일이고요. 개인적으론… 제 레스토랑 개업한 거죠."

'흑수선'을 재미있게 봤다고 인사말을 건넸다."그러면 쉰세대시군요. 하하하." 기자가 쉰세대라는 것을 인정할까 말까 망설이는 찰나 바로 괜찮다는 듯 다음 말이 이어진다.

"저도 나이가 들었는지 '엽기적인 그녀'같은 코미디물은 썩 느낌이 오지 않네요.'흑수선'이 꼭 그런 영화라는 말은 아니지만 뭔가 사회적인 배경도 있고 보고 나서 되씹어볼 만한 주제가 들어간 영화가 진짜 영화라는 생각이 들어요."

KFC 앞에서 사진을 찍고 그가 5월에 문을 열었다는 이탈리아 레스토랑 '일 마레'로 자리를 옮겼다. 매니저가 "이곳 인테리어는 이정재씨가 직접 한 것"이라고 귀띔해준다. 짙은 고동색 미송으로 깐 바닥과 같은 색깔의 테이블.의자, 그리고 하얀 바탕에 카키색으로 밑단이 처리된 깔끔한 식탁보까지 전부 그가 더듬이를 움직여 고른 것이다.

"잘 아시죠? 제가 영화배우 안 됐으면 지금쯤 인테리어 디자이너 하고 있을 거라는 거요." 스타들의 흑백 사진을 액자에 담아 걸어놓은 한쪽 벽에서 영화배우 사장이 운영하는 집이라는 냄새가 솔솔 풍긴다. 앨프리드 히치콕.알 파치노.제레미 아이언스.잉그리드 버그먼…. 인물 사진집을 여러 권 뒤져가며 고르고 고른 사진들이다.

미니멀하면서도 지루하지 않은 게 느낌이 괜찮다. 꼭 낡은 청바지와 가죽 점퍼라는 평범하고 단순한 차림이지만 꽈배기 모양의 스카프로 멋을 부리고야 만 그의 옷차림새 같다. 하긴 그는 연예인 중에서 알아주는 '스타일리스트'니까. "식당에는 일주일에 두어번 나와요. 스파게티 맛이 괜찮은지 체크도 하고. 저 이래보여도 미식가예요."

자꾸 며칠 전 본 '흑수선'의 오형사 모습이 오버랩됐다.'흑수선'에서 그는 그야말로 '몸으로 부대끼는' 역이었다.

범인이 정말로 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 속에 무덤을 파고 여차하면 서울역 지붕 위까지 기어올라가는. 그에 비하면 '모래시계'의 보디가드 역은 훨씬 얌전했고 또 '폼나는' 것이었다. 레스토랑 사장과 형사라. 글쎄.

"안성기 선배처럼 생활이 곧 연기인 배우가 있는가 하면, 저처럼 양면성을 잘 유지시켜 나가는 쪽이 있는 것 같아요.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주로 알려진 이미지와 달리 평소 저보고 깔끔하다, 세련됐다고들 하시잖아요."

그러고 보니 섬세한 남자 이정재에 대한 소문이 무성한 게 사실이다. 피아노와 트럼펫을 배운다더라, 와인 매니어라더라 하는 얘기까지 말이다.

"피아노랑 트럼펫요? 집에다 사다 놓기만 했어요. 얼른 배워야 하는데…. 영어도 선생님만 구해놓고 아직 시작을 못해서 걱정이 태산이에요."

그는 올 겨울에는 3년 전에 타고 못 탄 스키 한번 타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요즘 신작 '오버 더 레인보우'를 촬영하느라, 또 이렇게 '엉뚱한 사람'과 데이트하느라 정작 여자친구 만날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고. 이날만 해도 인터뷰가 네 차례 잡혀있었다. 다음날은 하루 종일 촬영.

"연인들이라면 당연히 겨울이 설렐텐데. 바빠서 잘 못 만나고 대신 전화 통화만 해요. 어쩌죠? 데이트하고 싶은 남자가 이렇게 무드가 없어서."

글=기선민 기자.사진=변선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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