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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현인’을 기다리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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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수십 년 똑같은 레퍼토리를 되풀이하는 버크셔 해서웨이 주총에 왜 미국은 물론 세계 투자자가 열광하는 것일까. 백 마디 말보다 주가가 모든 걸 설명해 준다. 버핏은 1962년 매사추세츠주 뉴베드퍼드라는 촌구석에 묻혀 있던 버크셔 해서웨이라는 방직회사를 주당 8달러에 인수했다. 현재 이 회사 주가는 11만7700달러다. 48년 만에 1만4712배로 만들었다. 같은 기간 미국 다우지수는 16.6배가 됐을 뿐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숫자에 밝았다. 그 소질을 잘 살려 기업 회계장부에 숨겨진 암호를 해독하는 나름의 비법을 터득했다. 남들이 유행에 휩쓸릴 때 그는 묵묵히 회계장부를 뒤지며 진흙탕 속 진주 찾기에 몰두했다. 그 속에서 건져올린 게 코카콜라·질레트·베스트바이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코카콜라는 20여 년 만에 세계적 기업이 돼 버핏을 투자의 지존(至尊)으로 만든 1등공신이 됐다.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숫자에 밝은 사람은 다른 나라에도 많았을 텐데 하필 미국에서만 버핏 같은 현인이 나왔을까. 뒤집어 보면 버핏은 미국 경제가 낳은 영웅이 아닐까. 버핏이 버크셔 해서웨이를 인수했을 때 미국 경제는 막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버크셔 해서웨이가 코카콜라 덕에 날개를 달기 시작한 80년대는 ‘팍스 아메리카나(미국이 지배하는 세계)’의 시대였다. 미국 기업이 세계로 뻗어가면서 눈덩이처럼 불어난 기업 연금은 닥치는 대로 주식을 사들였다. 80년대 후반엔 ‘401(k)’이라는 퇴직연금이 도입돼 샐러리맨 사이에서 주식·펀드 투자 열풍이 불었다. 한마디로 시대가 영웅을 낳은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 세상은 달라졌다. 제2의 버핏 같은 현인을 잉태하기에 미국 경제는 너무 노쇠했다. 세계를 호령하던 제너럴모터스(GM)조차 파산 위기에 몰렸으니 말 다했다. 돈 냄새에 동물적 감각을 지닌 버핏이 아시아로 눈을 돌리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주총 뒤 연 기자회견에서도 그는 중국·일본 기업에 유독 관심을 보였다.

그렇다면 우리도 ‘서울의 현인’을 한 번쯤 꿈꿔볼 수 있지 않을까. 낯선 미국에서 진주를 캐라면 어렵겠지만 우리 안마당인 아시아에서라면 한번 붙어볼 만하지 않겠냐는 거다. 마침 국내 펀드시장도 성숙할 만큼 했고 퇴직연금도 도입됐다. 80년대 미국 못지않게 신방은 멋지게 차려졌다. 20~30년 뒤 세계가 주목할 서울의 현인을 잉태하는 태몽을 꾼다면 나른한 봄날 춘몽(春夢)일까.

정경민 뉴욕 특파원 (오마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