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윈도] 텍사스 목장의 부시-푸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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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듬 해인 1946년에 태어났다. 전쟁은 끝났지만 유럽의 반은 소련 공산제국의 차가운 그늘로 들어가고 있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한국전쟁이 마감되는 1953년에 출생했다.

미국과 소련이 전쟁 일보 직전까지 치달은 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부시는 고등학생, 푸틴은 초등학생이었다. 사춘기와 청년기를 거치면서 두 사람의 눈에 비친 세계는 선(조국)과 악(상대국)이 맞서는 치열한 냉전이었다. 2001년 11월 15일. 두 사람은 미국 텍사스에 있는 부시의 크로퍼드 목장 인근의 한 고등학교에 나란히 섰다. 부시가 말했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러시아는 미국의 적이었다. 지금 여러분은 러시아가 친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오래된 (대결의)끈을 끊어버리고 세계를 더욱 평화롭게 만들기 위해 함께 일하고 있다." 푸틴은 학생들의 대통령을 치켜올렸다. "그는 말하는 것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지금까지 미.러 정상회담이 수십차례 열렸지만 푸틴의 이번 방문은 독특한 것이었다. 푸틴 내외는 부시의 텍사스 목장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부츠를 신고 청바지를 입은 부시는 직접 픽업 트럭을 몰고 헬기에서 내리는 푸틴을 맞았다.

부시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이곳저곳을 보여준 후 푸틴을 저녁 테이블로 이끌었다. 관목으로 훈제하고 후추로 양념한 텍사스식 쇠고기 안심구이, 훈제 메기요리가 등장했다. 부시는 "집에는 대개 좋은 친구만 초대하게 마련"이라며 건배를 제의했다. 푸틴은 "외국 지도자의 집에 초대받기는 처음"이라며 "나와 내 조국에 무척 상징적인 일"이라고 화답했다.

푸틴의 미국 여정이 즐거운 파티의 연속만은 아니었다. 두 정상은 핵무기 대폭 감축에는 합의했지만 최대 갈등현안인 미사일방어(MD)와 탄도탄요격미사일(ABM) 협정문제에서는 여전히 대립했다.

그렇지만 크로퍼드 목장에서 세계는 변화의 역동을 목격했다. 미국과 러시아는 우방의 시대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냉전의 아들 부시와 푸틴. 그들은 과연 미.러 신시대의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김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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