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책읽기] '씰크로드학' '고대문명교류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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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동서교류사 연구자인 정수일(67.일명 무하마드 깐수) 전 단국대 사학과 교수가 새 집을 한 채 올렸다.'실크로드학(學)'이란 집이다.동서 문명교류학이라 부름직한 웅대한 규모다.역사학과 문명사 연구의 영역 개척이자,학문연구의 새 패러다임 제시로 해석해도 좋을 듯 싶다.

중앙일보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밝혔듯 "너무 분량이 많아 출판사 두 곳에서 나눠 출간할 수밖에 없었던" 『씰크로드학』과『고대문명교류사』는 근대 이후 우리 학계가 산출해낸 업적 중의 하나로 꼽힐 만하다.

두 책은 동전의 양면처럼 연결됐다. 때문에 다소 중복되는 내용도 많다.『씰크로드학』이 저자가 개창한 학문영역 선언서에 해당하는 총론이라면,『고대문명교류사』는 통사작업의 첫권이다. 계획대로라면 향후 『고대문명교류사』에 이어 『중세문명교류사』와 『근.현대문명교류사』로 대미(大尾)를 보게 될 것이다. 저작물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문명교류'다.

문명의 충돌이 아니라는 얘기다.두 책은 문명의 전파와 수용이 인간 생존의 조건이자 사회발전의 원동력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료를 시대별로 제시하며 '실크로드학=문명교류학'의 명제를 실증하는 구도로 짜였다.

저자는 중세 중앙아시아지역의 동서를 잇는 통로로만 알려졌던 실크로드를 구석기시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 역사를 새롭게 통관하게 하는 핵심 코드로 격상시킨다. 실크로드 개념의 전지구적 확대인 이번 작업은 이제껏 아무도 가보지 않았던 길일 수는 없다.

그 점에서 저자의 이번 입론(立論)과 저작은 '콜럼버스 달걀 세우기'로 비견되지만, 실은 그 이상이다. 동서와 고금을 넘나드는 자료를 토대로 했고, 40여년 학문적 온축이라는 점을 고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의 이번 작업 이전에도 실크로드에 대한 연구는 20세기 초반부터 세계적으로 상당히 축적돼 왔다. 그러나 대부분 중앙아시아 지역에 한정된 교통사나 지역학 혹은 몽환적 이미지의 이색 취향에 편중해왔다. 이 점이 바로 실크로드의 개념과 시공간적 대상을 전지구적으로 확대해 세계사를 다시 쓰고 있는 것과의 차별성이다. 즉 저자에게 실크로드란 개념은 "문명의 교류가 진행된 환지구적(環地球的)통로의 범칭(汎稱)"인 것이다.

그는 중앙아시아 일대의 오아시스들을 연결한 '오아시스로'와 북방의 '초원로', 그리고 실크로드를 대체한 것으로 간주되던 바닷길인 이른바 '향료길'까지 포함하는 것은 물론이고, 17세기 스페인이 신대륙 식민지화를 계기로 중남미와 아시아 국가들 간에 태평양을 횡단하는 '태평양 비단길' 혹은 '백은(白銀)의 길'까지 확장시킨다.

사실 15세기부터 이미 신대륙에로의 해상통로가 열리고 물물교류가 시작되었는데, 지금까지는 '유럽중심주의' 문명관에서 출발해 문명교류를 단향적(單向的)으로, 그리고 국부적으로 유라시아대륙에만 국한시켜왔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 실크로드의 끝은 중국이 아니라 한반도까지 연장된다는 점도 주목된다.

세계사가 '교류'라는 물줄기 앞에서 새롭게 조명되는 작업의 첫 단추는 구석기시대 아름다움과 다산(多産)의 상징인 비너스 상(像)이다. 저자는 비너스상이 유럽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것은 물론 최근엔 중국 동북지방과 일본 북부지방에서도 유사품이 출토되었다고 밝힌다.

역사적 유물의 지리적 산재에 대한 예증은 시대별로 계속 이어지는데, 신석기시대엔 거석문화와 빗살무늬 토기 등이, 그리고 청동기 시대의 무기와 생활용기 등 각종 주형을 거쳐 보석과 옥(玉), 그리고 유리 등이 제시된다.

이번 『고대문명교류사』는 후기 구석기시대부터 유목 기마민족의 등장,로마와 중국의 교류, 그리고 불교와 기독교의 전파와 수용이 전개된 기원후 5~6세기까지를 다룬다.

그의 서술에서 물론 논쟁의 여지는 있다. 저자도 인정하듯이 세계 학계에서 문명사를 보는 시각이 교류설과 자생설(自生說)로 대립해 있음에도 저자는 교류설의 관점만을 일관되게 유지한다. 그럼에도 이 책의 성과가 줄지는 않을 것이다.

세계적 연구수준을 반영하며 실크로드학이라는 문명교류사를 일궈낸 창학(創學)작업은 그 자체로 평가할 만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도 학문, 특히 인문학 분야에서 남의 뒤따름만이 아니라 무언가 앞섬이 있어야 하겠다는 시대적 사명을 깊이 간직하면서"책을 썼다는 저자의 자부심은 국제화.세계화 시대에 주목할 가치가 충분하다.

그러면 산업혁명 이후의 현대세계는 어떻게 설명될 것인가□ 저자는 e-메일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근세 들어 문명교류의 통로는 철도와 비행기, 기선 등 지상과 공중을 망라한 입체적 네트워크로 뒤덮였기 때문에 신(新)실크로드 단계로 명명해야 한다".

한동안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경의선과 러시아 시베리아철도를 잇는 '철의 실크로드'도 그 '신실크로드'의 간선 중 하나가 될 것이라는 얘기다. 그는 이렇게 다양하고 입체적인 교통망에 의해 근.현대의 문명교류는 내용과 방법, 그리고 문화접변에도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면서 이번 '전통적인' 실크로드학의 학문적 정립 작업에 이어 '신실크로드학'도 앞으로 이론적으로 체계화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민족사의 비극 위에 겹쳐진 저자의 평탄치 않은 개인사를 고려할 때 이 책은 진흙탕 위에 핀 한 송이 연꽃으로도 보인다. 오래 전부터 구상했지만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금돼 출판을 못하다 5년이 넘어서야 빛을 보게 된 난생아(難生兒)인 것이다. 이 책이 제시한 문명교류라는 상생(相生)의 화두가 인류의 미래를 밝혀줄 진정한 비단길이 되길 기원한다.

배영대.김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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