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멜다 당선 … 마르코스 가문의 부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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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스 필리핀 전 대통령의 부인 이멜다(가운데)가 10일(현지시간) 마닐라 북부 일리코스주 한 투표소에서 아들 봉봉(오른쪽), 딸 아이미(왼쪽)와 함께 투표용지를 쓰고 있다. 봉봉과 아이미는 각각 상원의원·주지사에 출마해 당선이 유력하다. [바탁 AFP= 연합뉴스]

필리핀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인 자유당의 베니그노 노이노이 아키노(50) 후보가 당선됐다. 필리핀 선거관리위원회는 11일 개표가 78% 끝난 결과 아키노 후보가 40.2%(1220만 표)를 득표했다고 발표했다. 아키노 당선인의 아버지는 독재자 페르디난도 마르코스 전 대통령에 맞서다 암살당한 민주화의 영웅 베니그노 니노이 아키노다. 어머니는 1986년 피플파워 혁명을 주도해 마르코스 정권을 무너뜨린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이다.

아키노

노이노이 아키노 후보는 25.5%의 득표율로 2위를 달리고 있는 ‘국민의 힘 당(PMP)’의 조지프 에스트라다(73) 후보를 크게 앞질렀다. 영화배우 출신 전직 대통령인 에스트라다(1998~2001년 재임)는 부정부패 혐의로 탄핵 압력을 받다 스스로 물러났다. 집권 ‘여당연합’인 라카스-캄피-CMD의 대선 후보인 길베르토 테오도르(45) 전 국방장관은 4위에 그쳤다.

부통령 선거에선 39.5%를 얻은 PMP의 제호마르 비나이(68) 후보가 자유당의 마누엘 마르 로하스 2세(52) 후보를 근소한 차이로 앞서고 있다. 비나이는 필리핀의 금융 중심지인 마카티 시장이다. 자유당 당수인 로하스 2세는 1946년 필리핀 초대 대통령에 오른 마누엘 로하스의 손자다.

◆“새 필리핀 건설하자”=개표 초기부터 아키노 후보가 크게 앞서나가자 아키노 캠프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아키노 후보는 당선이 유력시되자 “국민 모두의 승리”라고 말했다. 지지자들은 “새로 도입한 자동 투표 방식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아 뙤약볕에서 오래 기다려야 했지만 우리의 투표 의지를 꺾지 못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키노는 "2004년 대통령 선거 개표 조작 의혹에 대해 아로요 대통령은 정밀 조사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따라 취임 이후 과거청산을 둘러싸고 정국 파란이 예상된다.

◆‘이름값’ 한 정치 가문들=대선과 함께 상·하 의원,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도 치러졌다. 아키노 당선인의 아버지를 탄압했던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가문은 정치적으로 재기했다. 여전히 가문의 영향력이 막강한 북부 일리코스주에서 하원의원에 출마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부인 이멜다(80)는 일찌감치 당선권에 들었다. ‘3000켤레의 구두’로 유명한 이멜다는 중간개표 결과 9만6000표를 얻어 2위 후보(2만3000표)를 멀찌감치 따돌렸다.

전체 24석 중 이번에 12석을 선출하는 상원의원 선거에 나선 아들 마르코스 2세(52)는 11일 오후 현재 7위를 달리고 있어 당선 안정권에 들었다. 일리코스주 주지사에 도전장을 던진 마르코스의 장녀 아이미(56)도 당선이 유력하다고 GMA방송이 전했다. 이멜다는 “나는 아키노 가문 사람들이 두렵지 않다”고 말했다.

또 현직 대통령 신분으로 하원의원에 출마해 입방아에 오른 아로요도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됐다. 아로요의 아버지는 9대 대통령을 지냈다. 대선 후보 에스트라다의 아들 에스트라다 2세는 상원의원 선거 중간 개표결과 2위를 달리고 있어 당선이 확정적이다.

필리핀의 ‘가문정치’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200여 개에 달하는 필리핀의 유력 가문들은 막대한 토지와 기업들을 소유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필리핀의 정치평론가인 라몬 카시플레는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에 “필리핀 정치 가문의 힘은 나라보다도 강하다”고 말한 바 있다.

유력 가문 출신은 아니지만 아시아 복싱 선수로는 사상 최초로 6체급을 석권한 필리핀의 복싱 영웅 매니 파퀴아오 후보도 하원의원 당선이 유력하다.

홍콩=정용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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