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동네 도서관 가는 즐거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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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나라 걱정에 세상 개탄하는 말과 글이 넘치는데 어쩌다 한가한 이야기 좀 늘어놓는 것도 이 좋은 계절에 그리 부질없는 일은 아닐 것 같다.

필자가 사는 동네 가까운 곳에 구립 은평도서관이 며칠 전 문을 열었다. 주택이 빼곡이 들어선 언덕배기의 끝자락 야산 기슭에 작은 성채처럼 자리잡은 모습이 볼수록 기분 좋다. 공공시설이 빈약한 강북 동네에 도서관이 세워지는 것이 반가워 지난해 말부터 몇차례나 공사 현장을 기웃거리며 개관을 기다려왔던 터다.

*** 해질 무렵 노을 바라보며…

이 도서관은 개관도 하기 전에 유명해졌다. 본지 신혜경 전문기자는 '도시와 건물' 기사에서 '해질 무렵 노을을 바라보면서 사색에 잠기는 모습이 설계자의 건축 동기'라며 이 건물의 특징을 이모저모 소개했다.

또 한양대 임지현 교수는 한 신문에 '한 건축가의 작은 승리'라는 제목의 칼럼을 써 이 건축물과 건축가('시인 건축가'로 불리는 곽재환씨)를 칭찬했다.

임교수는 칼럼에서 이 건축물이 도서관 또는 공공건물에 대한 고정관념을 무너뜨렸다고 했다. 또 과시적이고 물신숭배적인 이 땅의 건축문화에 대한 반란의 몸짓이 읽혀졌다고 썼다. 그러면서 국기봉에 얽힌 얘기를 풀어나갔다.

이 국기봉은 애초에 주차광장 한켠에 자리가 마련됐으나 담당 공무원의 요구로 도서관 입구에 세워졌다.

이로 인해 임교수의 말대로 '국가주의의 상징'은 '철제 이빨을 드러내며' 도서관 입구를 상징하는 다섯개의 원기둥을 압도하게 됐다. 이에 건축가는 구청장에게 간곡한 편지를 보내 국기봉을 원래 위치로 보내달라고 요청해 시정을 약속받았다는 것이다.

임교수는 '이 작은 승리가 그 어떤 혁명의 승리만큼이나 기쁘다'고 썼다(그러나 개관한 지 보름이 됐지만 국기봉은 아직도 도서관 정면에 그대로 서 있다.

담당자가 약속을 잠깐 잊었는지, 아니면 너무 바빠서인지는 모르지만 하루빨리 약속이 지켜지길 기대한다).

이 도서관은 건축에 관한 비전문가가 보아도 매우 독특하다. 우선 안으로 들어가면 건물 중앙에 하늘로 뚫린 큰 공간이 있고 네모 반듯한 그 바닥엔 물이 담겨 있다. 반영정(反影井)이라 붙여진 이름 그대로 하늘과 건물 그림자가 물에 비친다. 책 읽다 쉬는 틈틈이 자기를 들여다보는 우물 혹은 거울이란다.

2층과 3층 옥상엔 성채의 망루처럼 보이는 휴식공간이 여러개 마련되었는데 산기슭 서향건물의 이점을 살려 응석대(應夕臺)라 이름 붙였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멀리 변두리 동네와 야트막한 야산 너머로 지는 석양이 매우 아름답다.

서가 곳곳에 빈자리가 남아있다는 아쉬움을 빼면 지하 1층 지상 3층에 갖춰진 여러 시설도 훌륭하고 편안하다. 이 정도면 여가시설이 마땅찮은 어린이나 학생은 물론, 어른들도 시간을 내 한번쯤 들러볼 만 하다.꼭 책을 읽지 않아도 좋다.

'작가와의 대화' 프로그램,문화교실, 컴퓨터교육 등에 참가하거나 아니면 응석대에서 석양을 바라보는 여유를 가져도 좋을 일이다.

얼마 전에 나온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 한해 동안 국민 5명 중 3명이 1권 이상의 책을 읽었으나 한사람당 평균 독서량은 13.2권으로 4년 전 조사 때보다 3권 가량 줄었다고 한다. 반면 주간 평균 TV시청 시간은 23.7시간으로 4년 전 보다 2.3시간 늘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문맹이 아니라 책맹(冊盲)을 걱정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다.

*** 삶의 여유 찾는 문화교실

물론 도서관 시설도 열악하다. 우리나라 공공도서관은 국민 11만5천명당 1곳으로 OECD 국가 중 최하위다. 서울만 따진다면 33만명당 1곳에 불과하고 인구 1백만 밀집지역에 공공도서관 1곳뿐인 경우도 있다고 한다.

훌륭한 동네 도서관이 있고, 그곳에서 삶의 여유를 찾는 주민은 행복하다.

다만 강아지를 끌고 오거나 옥상 잔디밭에서 술판을 벌이는 불청객 때문에 옥상과 뒷산을 잇는 구름다리(설계자는 이를 '석교'라 이름붙였다)출입문을 개방하지 못하는 도서관장의 고민은 알아줘야겠다.

한천수 <사회담당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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