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재정정책에 대한 오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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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경기침체에 대한 우려가 커지며 다양한 경기부양 대안들이 제시되고 있다.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재정정책에 대한 관심이다. 문제는 재정확대에 대한 찬반론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주장의 근거가 적절치 않은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 효율성 낮은 경기부양책

우선 전통적으로 재정부문의 건전성을 자랑해온 정부의 입장에서는 스스로 지출의 고삐를 푸는 일이 달갑지 않을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적자기조로 돌아선 나라 살림을 재정비해 2003년에는 균형으로 돌려 놓겠다는 멋진 계획에 대한 미련이 클 것이다.

그러나 경기회복이 워낙 더디고 금리 인하나 증시 부양과 같은 익숙한 정책의 약효가 신통치 않으니 재정수단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한 마디로 마지못해 끌려가는 식이다.

문제는 이런 소극적인 태도로 정책을 펴서 무슨 효과가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경기부양의 확신만 있다면 단기적으로 적자를 내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반면 실효성에 자신이 없다면 한 푼이라도 살림을 아끼는 것이 정석이다.

그런데 정부의 재정운영을 보면 이도 저도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적자는 피하면서 경기부양을 해보겠다고 시행한 예산 조기집행 정책은 실제 운영과정에서 별다른 정책의지가 보이지 않았고 그 결과 재정은 오히려 긴축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추경예산 편성의 관행을 보면 한숨이 더 나온다. 이런 식으로 어차피 지출을 늘릴 것이라면 애초의 예산심의에서 좀더 확실한 정책의지를 가지고 예산배분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살림을 못한 책임도 제대로 묻지 못하고 아까운 재정만 슬금슬금 축내는 풍조에서 재정지출이 제 효과를 내리라고 기대하기 힘들다.

무릇 모든 정책이 그렇듯이 재정정책 역시 1차적인 평가기준은 실효성이고 그 다음에 따질 것은 정책에 수반되는 비용이다. 이러한 평가가 냉정하게 이뤄지려면 우리의 재정여건과 경제현실을 직시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재정에 관한 작금의 논의를 보면 문제의 맥을 짚지 못하는 주장이 많다. 그물을 치면 토끼가 절로 와줄 것이라는 정책사고도 답답하지만 경기적 적자와 구조적 적자의 개념 구분조차 없이 지출확대는 큰 정부로 이어진다는 식의 단순논리를 펴는 것도 곤란하다.

재정정책의 시차를 말하지만 그런 문제는 예견해서 타이밍을 맞추면 될 일이다. 미국의 예를 들어 지출보다는 감세의 효율성을 말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지금 시장의 불확실성이 커 가격유인이 제대로 먹히지 않는 한국에 살고 있다.

공적자금이나 사회보험과 같은 구조적 지출압박 요인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세원확대 없는 소득세나 소비세율의 대폭 인하는 재정 건전성의 차원에서도 위험한 선택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우리가 쓸 수 있는 재정수단의 폭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경기적인 목적으로 단기 지출을 늘리는 것은 충분히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양과 질이 제한적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이자나 복지지출과 같은 경직적 항목을 제하면 신축적으로 쓸 수 있는 예산의 비중이 그다지 크지 않고 재정집행의 관행 역시 유연하고 효율적이지 않다는 얘기다. 공적자금의 재정부담 등 구조적 지출요인이 늘 것이라는 전망도 추가적인 제약이다.

*** 시장의 불확실성 제거를

결국 논쟁은 요란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경제여건의 변화 없이 감세나 재정확대가 큰 효과를 내리라고 기대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정책을 포기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정책의 수순을 제대로 밟으라는 것이다.

경직성 지출의 비중을 줄이고 예산집행의 효율성을 높이지 않는 재정확대는 득보다 실이 클 수 있다. 기업에 대한 세제지원을 하려면 불합리한 규제를 정비해 투자의욕부터 살리는 것이 순서다. 구조조정의 지연으로 시장의 불확실성이 산재해 있는 상황에서 세금 몇푼 깎아준다고 돈 펑펑 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소비자나 기업가나 이 시점에서 가장 간절히 바라는 것은 우리 경제의 미래에 대한 확신이다. 경제정책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으로 추락한 현 시점에서 어쭙잖은 정책을 내놓는 것 자체가 또 다른 불신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바꿔야 할 것부터 바꾼다면 누가 뭐라 하겠는가.

全周省(이화여대 교수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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