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틴틴 책세상] '나의 아빠 닥터 푸르니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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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가족 사진첩에는 내가 좋아하는 사진이 한 장 있다. 바로 아빠와 나의 사진이다. 아빠는 소파에 길게 누워 책을 읽고 있다. 나는 바로 그 옆에 앉아 있다. 나는 한 살쯤 된 것 같고, 행복해 보인다. 내게는 그 어떤 나쁜 일도 일어날 수 없다. 아빠와 함께 있으니까. …어째서 지금의 아빠는 늙고, 서글프고,우리에게 이야기도 하지 않고, 엄마에게 고약하게 대하고, 때때로 우리를 겁에 질리게 만드는 것일까? 어디로 가버렸을까. 사진 속의 아빠는."

아버지에 대한 애증어린 유년 시절의 추억을 유머러스한 반전과 경쾌한 필치로 녹여낸 에세이 『나의 아빠 닥터 푸르니에』의 한 대목이다.

1999년 프랑스에서 처음 출간됐을 때 "『꼬마 니콜라』가 돌아왔다"는 평을 받았다는데,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소재가 66편의 짤막짤막한 일화들 속에서 때로는 따스한, 때로는 가슴아린 웃음을 선사한다.

뛰어난 의사이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겐 친절하고 훌륭한 '자선가'였지만, 알콜 중독자인데다 무능력한 가장이고 가족에겐 툭하면 거친 언행을 보였던 '지킬 박사' 아버지.

모처럼 경주용 자전거를 사주면서 사이클 전용 타이어 대신 평범한 고무 타이어를 끼우게 한 아버지에게 실망하면서도 "어쨌든 아빠는 내가 사고날까봐 걱정스러워하고 있었다"며 흐뭇해할 만큼 부정(父情)에 굶주렸던 소년.

그는 아빠의 죽음 앞에서도 아빠가 언젠가는 술을 끊을 거라는, 그래서 집에 돈이 생기고 엄마도 더이상 일을 할 필요가 없게 될 거라는 기대가 무너진 사실에 더욱 슬퍼한다.

이런 이야기를 작가는 매우 산뜻한 방식으로 풀어나간다.

이를테면 술을 마시면 자기 아내와 아이들을 때리는 심술궂은 사람들이 있다는 둥, 아빠는 다행히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자신조차 때린 적이 없다는 둥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아빠가 나를 처음으로 때린 날'도 막판에 이렇게 독자를 놀린다(?).

"아빠가 꼭 한 번 나를 때렸다지만, 나는 기억이 없다. 내가 태어난 날 벌어진 일이었으므로. 엄마가 말해준 바에 따르면, 내가 갓 태어났을 때 숨을 쉬지 않자 아빠는 토끼라도 잡는 것처럼 내 두 다리를 모아 쥐고 들어올려 내 등을 철썩 때렸다. 아마도 그 바람에 나는 살아보기로 마음을 정한 것 같다."

마흔세살에 돌아가신 아버지보다 더 나이가 많아진 작가의 마지막 말은 또다른 여운을 준다.

"난 아빠를 원망하지 않는다. 이제 어른이 된 나는 사는 게 간단치 않다는 걸 알고 있다. 견딜 수 없는 자신의 삶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좋지 않은' 방법을 사용했다고 해서 나약한 이들을 너무 원망해선 안된다는 것을."

김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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