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출판] '욕망,광고,소비의 문화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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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광고사 연구가 매력적인 사회문화사 분야의 방법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신간 『욕망, 광고, 소비의 문화사』(원제 Twenty Ads That Shook the World)의 서문에 나온 사례를 우리 식으로 한번 패러디해보자. 먼저 20~30대에게 이순신 장군의 우국 시조를 완성하라고 해보는 거다.

"한산섬 달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어디서 ( )는 남의 애를 끊나니". 정답을 확신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긴가민가 하는 독자들을 위해, 답은 '일성호가'다). 하지만 똑같은 사람에게 최진실을 유명하게 만든 광고카피가 뭐였느냐고 물으면 대뜸 말할 게 분명하다."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

기존 예술의 자리를 상업광고가 대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마셜 맥루한의 표현을 빌리자면 광고야말로 20세기의 예술형식이 됐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마케팅이 아닌 지배문화의 관점에서 광고를 연구하는 것은 미국에서도 이제 시작단계라고 한다. 특정 광고의 히트 배경은 무엇인지, 그 광고가 해당 상품뿐 아니라 다른 사물에 대한 우리의 시각까지 어떻게 바꿨는지 등을 다루고 있는 『욕망, 광고, 소비의 문화사』는 그런 점에서 의미있는 보고서다.

저자가 광고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로 꼽은 이는 '광고의 셰익스피어'라고까지 불렸던 P T 바넘이다. 사람을 끄는 엉터리 선전을 19세기엔 '야바위(humbug)'라고 했는데, 자칭 '야바위의 왕자'였던 바넘의 '지상 최대의 쇼' 서커스 광고는 기독교적 모티브를 이용한 과장광고의 전형이다.

"평생에 단 한 번뿐인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폭탄 세일!!" 등 지금 우리에게도 익숙한 과장이 바로 바넘식 표현들이다.

이어 저자는 독점기업이라는 특징 때문에 기업이 아니라 상품류 부문 전체를 광고해야 한다는 부담 속에서 "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라는 '영원한 카피'를 만들어낸 드비어스, 산타클로스의 이미지를 재창조한 코카콜라, 다 까발리는 것보다 적당히 감추는 기술을 이용한 폭스바겐의 풍뎅이 등의 이야기를 당시의 경제.정치상황 등과 엮어 풀어낸다.

담배 피우는 카우보이 '말버러 맨',"그녀는 할까, 안 할까□"란 카피로 히트친 염색약 미스 클레럴, 날고 싶은 인류 불멸의 욕망을 한껏 이용한 나이키의 '현대판 이카로스' 마이클 조던 등도 빼놓을 수 없다.

미국의 소비문화.상업주의를 보여주는 지표로서의 광고에 관한 이야기지만 저자의 시각은 결코 부정적이지 않다."비록 광고에 대한 비난이 적지 않지만, 광고가 우리를 타락시킨 것은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다.

오히려 광고가 인위적인 욕망을 만들어 낸다는 지적에 대해 그는 "역사와 인간본성에 대한 무지의 소치"라고 반박한다. 인간의 욕구는 언제나 문화적이었으며, 그같은 욕구를 만족시켜줄 다른 체제가 도래하기 전까지는 상업주의와 그에 수반된 문화가 더욱 더 번성하리라는 것이다.

김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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