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부시 비난하며 대화엔 미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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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23일 나온 북한 외무성 대변인의 담화에는 미국에 대한 복합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을 비난하면서도 협상 재개의 새 조건을 내걸었고 대화의 문도 열어놓았다. 행간에는 미국의 테러전에 따른 불안도 배어 있다는 분석도 있다.

먼저 지난 16일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을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한 부시 대통령에 대한 비판은 예견된 것이었다. 북한은 金위원장에 대한 비난을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보고 기계적 반응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담화가 "몰상식""가소로운 처사""정치인의 체모마저 갖추지 못한" 등의 표현으로 맞받아친데서 부시에 대한 북한 지도부의 격앙된 감정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담화는 비난 일색만은 아니었다. "미국과의 대화를 반대하지 않고,관계도 발전시켜 나가자는 입장"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클린턴 행정부의 마지막 시기에 취했던 입장 수준'을 협상 재개의 조건으로 내세웠다. 지난해 12월의 북.미 적대관계 청산, 다시 말해 북한 체제 안전보장을 골자로 한 공동 코뮈니케를 재확인하고 협상을 하자는 것.

여기에는 협상 의제나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주문도 들어 있다. 핵과 미사일을 의제로 삼아 개별적.순차적 협상을 벌여온 클린턴 행정부 때와는 달리 부시 행정부가 재래식 전력 감축문제도 들고나와 3개 사안의 동시 진전을 요구해 북한의 입지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한의 요구에 미국이 응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토머스 허버드 주한 미국대사는 최근 "대북정책의 연속성은 크지 않다"고 말해 협상 의제.방식을 바꾸기 어렵다는 점을 내비쳤다.

게다가 대화 재개의 여건도 좋지 않다. 테러전에 전념하는 미국은 북한 문제를 뒷전으로 밀어둘 수밖에 없다. 북한으로선 자신이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돼 있고, 생화학 무기 보유국이라는 점도 섣부른 대미 접근을 막는 요인이다. 예상치 못한 약점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성한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는 "북한은 이번 담화를 통해 일단 공을 미국으로 넘기면서 시간을 벌자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다"며 "북.미 대화는 미국의 테러전 양상이 명확한 가닥을 잡을 때나 가능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오영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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