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사람] 보관문화훈장 받은 윤형두 범우사 대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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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올해로 창립 35주년을 맞은 도서출판 범우사는 그간 3천여종의 책을 냈지만 특별히 '베스트 셀러'라 부를 만한 책은 없다.

"베스트셀러가 아니라 스테디셀러를 만든다"는 신념으로, 출간한 책이 베스트 셀러 조짐을 보이면 오히려 광고를 자제해온 윤형두(66) 대표의 고집 때문이다. 1976년에 초판을 낸 뒤 지금도 한달에 4천~5천부씩 꾸준히 나가고 있는 법정스님의 『무소유』가 그런 예다.

반면 안 팔리지만 의미있는 '비석 출판'에 1억~2억원씩을 기꺼이 투자하기도 한다. 그 결과가 『한국의 고지도』『겸재 정선 진경산수화』『돈황』 등이다.1년에 15명 정도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범우장학회' 운영도 어느새 올해로 11년째다.

이런 윤대표의 외길 인생에 정부는 지난 20일 보관문화훈장을 수여해 격려했다.

-먼저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요즘 출판계가 불황이라고들 하는데요.

"범우사의 경우엔 특별한 경영 노하우 없이도 크게 어려웠던 적이 없습니다. 꾸준히 팔리는 책만 1백여 종이니까요. 문제는 출판사들이 한번에 너무 큰 걸 노리거나 수요자층을 개발하려는 노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점점 책을 읽지 않고, 그나마 소위 '베스트 셀러'에만 편중되고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만.

"책이 안 팔리는 걸 독자들 책임으로 넘길 일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전국의 도서관 수준이 얼마나 열악합니까. 또 국방부에도 도서 구입예산은 따로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연대급 이상만 도서관을 마련하게 해도 팔 수 있는 책이 얼마나 많아지겠습니까. 출판인들이 힘을 합쳐 그런 예산을 만들도록 정치적 로비도 하고, 또 그런 곳에서 안 살 수 없는 책들을 만들고…. 그런 노력부터 해야죠."

-대부분의 출판사들은 도서관에서도 책을 안 사준다고 불평하는데, 오히려 출판사들의 잘못이 크다는 말씀이신가요.

"이를테면 저희 출판사에서 낸 『등소평 문선』이나 『모택동 선집』은 웬만큼 큰 도서관에선 다 사줬고, 앞으로도 지속적인 수요가 있는 책입니다. 국내에 아직 소개되지 않은 그런 중요한 원전들이 의외로 꽤 많아요. 그런 '과수(果樹)식 출판물'은 만드는 데 품도 들고 금방 결과가 나타나지는 않지만 오랫동안 그 열매를 따 먹을 수 있습니다. 지금 대부분의 출판사들은 '대박'을 기대하는 '투망식 출판'이나 몇 달 정도 기획해서 그 해 농사로 마무리하려는 '전답식 출판'을 하고 있죠."

-e-북 열기는 좀 가라앉았습니다만, 영상매체 세대에 인쇄물이 잘 먹히지 않는다는 얘기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올해 우리 출판사가 재간한 월탄 박종화 선생의 『여인천하』와 정비석 선생의 『명성황후』는 모두 20~30여년 전에 출간한 책들인데 요즘 TV드라마나 뮤지컬 덕분에 다시 잘 팔리게 된 것들입니다. 영상매체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거죠. 일본에서도 컴퓨터게임에 빠져 있는 아이들이 일단 만화책을 보기 시작하면 싫증도 덜 내고 더 빠져든다는 겁니다. 책의 그런 장점을 최대한 이용해야죠."

한국출판학회 회장이기도 한 윤대표는 오는 26~27일 아카데미 하우스 국제회의장에서 '21세기 국제출판환경의 변화와 대응방안'이라는 주제로 국제출판학술회의를 개최한다.

글=김정수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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