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1. 샛강<3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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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중앙통에는 상점은 물론 노점상들도 많았다. 라이터와 시계를 넣은 작은 유리상자를 올려놓고 기름을 넣어주거나 시계 수선을 해주는 노점에서부터 담배 몇 갑을 늘어놓은 노점, 군용 장갑이며 스웨터 야전잠바 등속을 파는 노점, 풀빵.호떡.군고구마 장수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는 곳을 두리번거리며 걷는데 갑자기 앞서 걷던 아버지가 걸음을 멈추었다. 바로 앞에서 우리를 지나쳐 가려던 키 큰 남자가 우뚝 섰다. 두 사람은 잠시 그대로 서서 외마디 고함을 지르더니 서로 부둥켜 안았다.

- 형님은 언제 내레왔시요?

- 일사 때… 경순이는 어디 가서?

- 집에 있디요. 여게 대구 말이야요.

두서없는 말이 빠르게 오고갔다. 두 사람이 그러고 서있는 사이에 구경꾼들이 원을 그리고 그들 주위에 멈추어 서서 구경하고 있었다. 구경꾼들은 제 일인 것처럼 덩달아 웃는 얼굴로 입을 벌리고 구경했다. 내가 보기에도 큰아버지는-이북 사람들은 외삼촌에게도 종종 큰아버지라고 부른다- 멋쟁이였다. 그는 어머니처럼 키가 컸으며 굽실굽실한 긴 머리를 뒤로 넘기고 가끔씩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훑어 올리곤 했다. 깃이 넓은 헐렁한 검은 외투를 입고 안에는 당시에 미군부대에서 나온 목 앞에 단추가 달린 국방색 털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잠바든 스웨터든 그렇게 생긴 옷깃을 왜 시보리라고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 경심이는?

- 예, 셋째는 지금 부산서 피난하구 있습네다.

- 주소 있디?

그 길로 당장 덕산동 피란살이하는 집으로 달려갔고 나는 연방 '오라버니, 오라버니'하며 흐느끼는 어머니의 울음 소리를 처음 들었다. 큰삼촌은 일본서 공부한 의사였으며 북에서 의대 교수를 했다. 그는 인문적 교양이 풍부해서 무슨 질문을 해도 척척 알아맞혔고 우리의 정신을 쏙 빼놓을 정도로 이야기를 재미있게 할 줄 알았다. 그에게서 처음 들었던 '을지문덕과 고구려 이야기'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뿐이랴, 큰삼촌에게서 한수 배웠던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얘기를 훗날에 나는 내 아이들에게도 해주었다.

-평강공주는 울보였단다. 바람만 불어도 울고, 비가 와도 울고, 꽃이 피어도, 새가 울어도, 날마다 울었단다. 그래서 대왕과 왕비는 '너 자꾸 그렇게 울면 바보 온달에게 시집 보낸다'하면서 겁을 주었대. 그렇게 컸는데 시집 갈 때가 되어서 신랑감을 구하는데, 평강공주가 떡 이러더래. '약속대로 나 온달이에게 시집 보내 주세요'.

어쨌든 큰삼촌과 셋째 경심이 이모가 그 뒤 남한에서 우리의 유일한 친척들이 되었다. 어머니는 오라비와 바로 손아래 동생을 가까이에 두고 살 수가 있게 되었다. 셋째 이모는 초등학교 교사 노릇을 했는데 유일한 딸이던 인옥이를 잃은 다음에 중년에 남편과 이혼하고 자식도 없이 혼자 살았다. 이모부가 다른 데서 아들을 낳고 살림을 따로 냈던 것이다.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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