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커튼 뒤 슬픈 운명들…새 영화 '물랑 루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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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물랭 루주(Moulin Rouge)는 '빨간 풍차'라는 뜻이다. 몽마르트에 자리잡은 이 '환락의 온상'의 붉은 커튼 뒤에는 꿈을 먹는 젊은이들이 살고 있다.

폐병에 걸린 줄도 모르고 유럽으로 진출해 뮤지컬 스타가 되려 하는 댄서 사틴(니콜 키드먼), 땡전 한푼 없지만 멋진 시를 쓸 열망에 불타는 시인 크리스천(이완 맥그리거), 그리고 크리스천을 한 패로 맞아들인 연극배우들이다.

폐병 걸린 여인과 가난한 시인의 사랑, 그리고 예정된 비극. 여인의 손을 녹여줄 장갑이 등장하는 건 아니지만 금방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이 떠오를 만큼 진부한 소재다. 실제로 바즈 루어만 감독은 호주에서 TV판 '라 보엠'을 연출했었다. 하나 그는 영리하게도 미국 대중문화에 빨대를 꽂아 신선한 영양분을 공급받는다.

가령 이런 식이다. 사틴에게 몸이 달아 물랭 루주를 어엿한 대극장이 되도록 스폰서를 해주겠다는 공작에게 물랭 루주의 주인 지들러(짐 브로드벤트)는 너스레를 떤다. "사틴이 그러는데 공작님은 그녀를 '처녀처럼(like a virgin)' 느끼게 한답니다"고.

흐뭇해진 공작이 떨리는 목소리로 "처녀… 처럼?"이라고 반문한다. 그러자 지들러는 "정말 처음으로 손이 닿는 것처럼 말이죠(touched for the very first time)!"라고 화답한다. 이어 마돈나의 '라이크 어 버진'을 합창한다.

관객의 폭소를 자아내는 노래 행진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미와 진리와 사랑을 찬미하는 보헤미안 크리스천의 대사는 컴펄레이션 음반 같다. "사랑은 산소와 같아. 사랑은 찬란한 거야. 사랑은 우리를 저 높은 곳으로 이끌지. 당신이 원하는 건 오직 사랑뿐." 사랑, 사랑, 샘솟는 사랑. 지치지도 않는다.

'투 다이 포'에 이어 스타덤에 오르길 열망하는 여인 역을 다시 맡은 니콜 키드먼의 연기는 후한 점수를 줄 만하다. 붉은 머리와 검은 드레스, 그리고 흰자위를 살짝 드러내는 눈동자가 빚어내는 카리스마 짙은 요염미는 같은 여자가 봐도 감탄스럽다. 그녀에게서 리타 헤이워스의 관능미를 찾는 미국 언론의 평이 과연 호들갑만은 아닌 듯싶다.

키드먼에 가려 빛은 좀 잃었지만 맥그리거는 '인질'에서 카메론 디아즈와 짝을 이뤄 맛보기로 보여줬던 춤과 노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맥그리거의 앞뒤 가리지 않는 열정과 순수함이 담긴 눈빛은 "(직업상)어느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던 사틴을 함락시킨다.

영화는 이렇듯 시종 흥겹고 신난다. 눈부시게 화려한 물랭 루주의 무대에서 쉼없이 계속되는 미희들의 캉캉 춤, 액자소설처럼 뮤지컬 안에서 상연되는 인도 무희와 기타 악사의 또 하나의 뮤지컬, 맥그리거와 키드먼이 능숙하게 부르는 사랑의 이중창, 크리스티나 아길레라를 위시한 MTV군단의 음악 공세…. 지들러의 단골 대사인 "쇼는 계속돼야 한다"는 말을 지키듯 쇼는 계속되고 또 계속된다. 마치 이래도 뮤지컬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느냐는 듯.

세탁기가 돌아가듯 소용돌이치는 그 속에 빨려들다 보면 어느새 관객은 비련의 사랑을 잊어버리게 된다. '물랑 루즈'라는 제목에서 곱추인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일생을 환락의 늪에 빠져 지낸 화가 툴루즈 로트렉의 그림자를 거의 느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26일 개봉. 15세 관람가.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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