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 '보도제한' 요청 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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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미국 테러참사 이후 미 언론의 보도 자세를 문제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미국 정부는 최근 테러 배후 용의자 오사마 빈 라덴의 성명을 언론이 그대로 보도해선 안된다며 '보도 제한'을 요청했으며 일부 언론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에 대해 미국의 미디어 감시단체인 FAIR(Fairness & Accuracy In Reporting)가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이 단체는 미 행정부.의회의 '반 테러법' 제정 과정에서 주요 방송사들이 시민자유 위협 등 독소조항들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은 점도 비난했다.

ABC.CBS.NBC 등 미국 주요 방송사 회장들과 주요 신문사 대표들은 지난주 각각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 보좌관 및 애리 플라이셔 백악관 대변인과 접촉했다.

라이스 보좌관은 빈 라덴의 추종 세력인 알 카에다의 사전 녹화 성명을 축약 보도하고 선동적인 내용을 삭제해 내보내줄 것을 방송사들에 요청했다. 테러 추종자들에게 보낼 암호 메시지가 녹화성명에 담겨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플라이셔 대변인은 주요 신문사들에 빈 라덴의 메시지 전체를 보도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뉴욕 타임스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몇몇 미디어 회장들은 백악관의 입장을 이해하는 태도를 보였다. 미디어그룹 뉴스 코퍼레이션 회장인 루퍼트 머독은 "애국적 의무라면 뭐든지 하겠다"고 말했다.

CNN은 정부의 지침을 신중히 고려하겠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고 CNN 회장 월터 아이작슨은 "논란이 될 내용의 보도를 피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FAIR는 "정부가 보도 내용과 편집에 영향을 주는 것은 문제"라며 "정보 차단은 비애국적이며 기자들과 일반 국민들에게 경종을 울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주언론협회(IAPA)도 16일 워싱턴에서 연례총회를 마치고 미국 언론이 제약을 받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IAPA는 백악관이 미국 TV방송들에 빈 라덴의 녹화 메시지 방송을 제한해달라고 요청한 것을 문제삼으며 "이런 자체 검열은 미국민의 알 권리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영국 방송들은 미국과 달리 빈 라덴의 녹화 성명을 자체 검열해달라는 정부의 요청을 거부했다. 앨러스테어 캠벌 영국 총리실 공보실장은 최근 국영방송 BBC, 뉴스 민방 ITN과 Sky News 책임자들을 만나 협조해달라고 부탁했으나 거절당했다.

이들 방송사는 공동 성명서를 내 "책임있는 방송사로서 국내외 안보와 보도의 여파에 대해 관심을 쏟고 있다"며 "그러나 공정하고 독립적인 판단으로 보도할 권리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천명했다.

김기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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