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두산 이경필 '체면치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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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마운드로 걸어올라가는데 앞이 안 보여요. 큰 게임에서 던져본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요. '내가 떨고 있구나' 생각하면서 숨을 크게 쉬고 던졌지요. 투볼로 카운트가 몰리니까 다시 다리가 후들거리고 포수가 안 보이는 거예요. '에라 모르겠다'하고 가운데로 던졌죠. 다행히 박종호(현대)가 스윙을 해줘 그때부터 풀리기 시작했어요."

팀이 가장 필요할 때 첫 포스트시즌 승리를 따낸 이경필(27.두산.사진)의 소감이다.

지난 15일 플레이오프 3차전 0-3으로 뒤진 4회초.

1사 만루의 위기에서 등판한 이경필은 박종호를 땅볼로 유도한 뒤 박재홍마저 삼진으로 잡아내 4회를 넘겼고 5,6회를 1안타 무실점으로 버텨 구원승을 따냈다. 2와3분의2이닝 무실점이었다.

홈런을 터뜨린 홍성흔.홍원기.안경현에 빛이 가렸지만 무너져가던 마운드를 지탱해준 이경필이 아니었더라면 두산의 역전승은 불가능했다.

이경필은 1999년 13승을 올리며 두산 마운드의 중심축으로 자리를 굳혔으나 뜻하지 않은 팔꿈치 부상으로 2년을 허송 세월했다.

올 시즌에는 다섯 경기에 등판했으나 승패를 하나도 기록하지 못했다. 시즌 초반 아팠던 팔꿈치가 나았다며 마운드에 올랐으나 다시 어깨가 아파 2군으로 내려가 1군에 올라오지 못했다.

그러나 차분히 2군에서 인고의 세월을 보낸 이경필은 팀이 가장 필요로 할 때 1군 마운드에 가세했다. 정규시즌 막판에 1군 엔트리에 등록, 지난 3일 시즌 최종전에서 기량 점검을 마쳤고 포스트시즌 엔트리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빚을 갚은 셈이죠. 99년 한화에 진 빚이지만요. 그때는 미안해서 동료들을 쳐다보지도 못했어요. 이젠 좀 당당해질 수 있겠습니다."

이선수는 99년 한화와의 플레이오프 4차전에서 패전투수가 됐던 빚을 갚은 셈이라며 기뻐했다. 그리고 남은 한마디를 잊지 않았다.

"공을 던질 수 있다는 게 정말 행복하다는 걸 이제야 알았습니다."

이태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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