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 대기자의 투데이] 탈역사의 한.일관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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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9월 17일 언론 포럼에 참가한 아시아 신문 편집인들을 청와대에서 만났다.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는 한.일관계의 해법과 한.일 정상회담의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金대통령은 이렇게 대답했다.

"일본이 일으킨 문제를 일본이 해결하면 일본 총리를 언제든지 만나겠다." 金대통령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총리에게 결자해지(結者解之)를 촉구했던 것이다.

그래서 고이즈미 총리의 한국방문이 발표됐을 때 그동안의 물밑접촉을 통해 과거사에 대한 사과, 역사교과서, 꽁치잡이에 관한 정상들끼리의 큰 타결이 합의된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이었다. 정부가 국민을 그렇게 오도한 것이다. 고이즈미 총리의 중국 방문이 확정되는 것을 보고 정부가 허겁지겁 고이즈미의 한국방문을 조건없이 받아들여 고이즈미 총리는 세계여론 앞에서 일본이 한.일관계의 복원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말을 할 수 있게 해줬다.

*** 日총리 첫 독립공원 방문

두말할 것 없이 한.일간의 현안은 역사교과서, 일본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러시아와의 협상으로 남쿠릴 열도에서 한국어선들의 꽁치잡이 금지다. 이런 현안에 대해 고이즈미 총리는 해결책을 갖고 오지 않았다.

그의 사과발언은 전임 총리들의 수준을 넘어서지 않았고, 신사참배는 일본식 국립묘지 구상으로 해결할 뜻을 밝혔다. 역사문제는 학자들의 연구위원회 구성을 제안하고, 꽁치잡이는 실무진의 검토사항으로 돌렸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사무사(思無邪)라는 알 듯 모를 듯한 글귀만 남았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과거에 대한 사과와 역사교과서와 꽁치잡이에 관해 일본의 큰 양보를 기대한 게 처음부터 현실적이 아니었다. 일본은 기본적으로 한국에 대한 사과와 보상은 그만하면 됐다는 입장이다. 어떤 총리도 정치적인 부담을 각오하지 않는 한 거기서 한걸음도 더 나갈 수 없다.

1970년 폴란드를 방문한 서독총리 빌리 브란트는 바르샤바의 옛 유대인 구역을 찾았다. 그는 나치독일에 학살된 50만 유대인의 위령비 앞에 무릎을 꿇고 독일인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만행을 사죄했다. 그러나 부럽지만 일본은 독일이 아니고 고이즈미와 그의 선배총리들은 브란트가 아니다.

부끄러운 과거까지 포함해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돌아보는 지적(知的).도덕적 용기에서 일본인은 독일인을 따르지 못한다. 철학적인 독일인에 비해 일본인은 즉물적이다.

독일의 통일대통령 리하르트 바이츠제커가 "과거의 잘못을 외면하는 국민은 미래에도 그런 잘못을 되풀이한다"고 경고했다. 브란트는 어떤 국민도 그들의 역사에서 도망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본 지도자들에게는 마이동풍(馬耳東風)이다.

백년이 흘러도 서대문 독립공원에서 무릎을 꿇는 일본총리는 없을 것이다. 역사문제는 새 세대의 일본인들이 왜곡된 교과서를 배척하는 데 기대하는 게 현실적이다. 문제된 역사교과서의 채택률이 우익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게 고무적이다.

일본의 국내정치를 고려하면 고이즈미 총리의 서울에서의 행동반경은 좁은 것이었다. 그래도 그는 일본 총리로는 처음으로 서대문 독립공원을 방문해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에게 가한 가혹행위의 현장에서 인간적인 충격을 받는 모습을 보였다.

미국이 당한 테러공격과 테러와의 전쟁, 그리고 지금 미국과 유럽에 공포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 백색가루 소동은 테러의 글로벌화가 얼마나 광범위한 것이고, 국제적인 연대 없이는 테러와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치를 수 없다는 것을 웅변으로 말해준다.

*** 미래지향적인 패러다임

우리가 능동적으로 입장을 바꿀 수밖에 없다. 바이츠제커는 95년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용서를 통한 "화해"는 원래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가 주도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일관계에서 화해의 손길은 일본이 한국에 내미는 게 아니라 한국이 일본에 내미는 것이라는 의미다.

우리에게는 일본에 대한 힘있는 지렛대가 없다. 그래서 흡족한 사과를 받고 우리가 원하는 내용의 역사교과서를 만들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에서 일본을 영원히 외면하고 살 수도 없다. 대승적인 자세로 한.일관계의 패러다임을 미래지향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이건 패배주의가 아니라 가해자에 대한 피해자의 용서요, 관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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