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52)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9면

구름처럼 모인 군중 속에 끼여서 장보고를 바라보며 소리쳐 말하였던 사람의 이름은 김양(金陽)이었다.

그는 태종 무열왕의 9대손인 진골 중의 진골이었으나 6년 전에 일어났던 김헌창의 반란으로 하루 아침에 멸문이 되어버린 비운의 인물이었다.

김헌창이 태종 무열왕의 7대손으로 아버지 김주원(金周元)이 억울하게 왕위에 오르지 못함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다면 김주원은 바로 김양의 증조 할아버지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김양의 할아버지였던 김종기(金宗基)와 김헌창이 형제간이었던 것이다.

김헌창과는 달리 그의 집안은 간신히 명문만 유지하던 진골귀족으로 그의 할아버지는 소판(蘇判), 그의 부친은 파진찬(波珍飡)의 벼슬이 고작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화위복이 되었으니 김헌창의 난에도 그의 집안이 무사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때 김양은 고성군(固城郡)의 태수, 그것도 김헌창의 난을 진압한 흥덕대왕이 살아남은 태종 무열왕계의 불만을 위무하기 위해서 내린 직책이었던 것이다.

"봐라."

변방의 고성에서 서라벌의 관부에 볼 일이 있어 잠시 상경한 김양은 이제 갓 20살의 열혈청년으로 구름처럼 모인 사람들에 끼여서 말을 타고 입조하는 장보고의 모습을 본 순간 갑자기 마음속에 무엇인가 끓어오르는 것이 있었다.

"봐라, 저자는 백제인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처럼 당당하게 말을 타고 대왕마마를 배알하기 위해서 입궐하고 있다. 그에 비하면 나는 무엇인가."

김양은 이를 악물면서 중얼거렸다.

"내 핏속에는 바로 삼국을 통일하여 위업을 이룬 태종 무열대왕의 피가 흐르고 있지 아니한가. 태종 무열왕의 9대손인 나는 이처럼 한갓 변방의 태수로서 한가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장보고란 저자는 위풍당당하게 군복을 입고 대왕마마를 배알하러 가고 있지 아니한가."

장보고에게 있어 평생을 통한 숙적이었던 운명의 인물, 장보고와 김양과의 만남은 이처럼 우연하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김양이 무례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처럼 장보고는 특이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장보고가 한 때 복무하였던 무령군(武寧軍)소장으로서의 중국 군복이었던 것이다.

장보고가 입고 있는 투구와 갑옷은 유난히 밝은 봄 햇살을 반사하여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으며, 마상에 앉아있는 6척 장신의 늠름한 모습은 마치 장보고를 전쟁에서 이겨 큰 무공을 세우고 돌아오는 개선장군을 연상케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 무렵 서라벌의 집들은 모두 볏짚이 아니라 기와로 연이어지고 있었다.

장보고가 입성하고 50여년이 흘렀을 때인 헌강왕(憲康王)6년 9월에 왕은 군신들과 함께 월상루(月上樓)에 올라 사면을 바라보았다고 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이때의 장면을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서울의 민가는 즐비하게 늘어섰고 가락의 노랫소리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왕이 시중 민공(敏恭)을 돌아보고 말하였다.

'내 들으니 지금 민간에서는 집을 기와로 덮고 짚으로 잇지 아니하며, 밥을 짓되 숯으로 하고 나무로서 하지 않는다고 하니, 그게 사실이냐.'

이에 민공이 대답하되 '신도 또한 그와 같이 들었습니다'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상(上)이 즉위하신 이래로 음양이 고르고, 풍우가 순조롭고, 해마다 풍년이 들어 백성들은 먹을 것이 넉넉하고, 또 변경이 안은하고, 시정이 환락하니, 이는 성덕의 소치이나이다'고 하매 왕은 기뻐하며 말하였다.

'이들은 모두 경들의 보좌 때문인 것이다. 내게 무슨 덕이 있으랴.'"

기록에 나와 있는 대로 거리는 즐비한 기와집과 담으로 연이어지고 있었고, 거리마다 풍악과 노랫소리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장보고를 쳐다보면서 투덜대던 김양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장보고의 일행은 인화문(仁化門)에서 멎어섰다. 문을 지키는 위병들이 막아 세우고 장보고는 말에서 내렸다. 차고 있던 칼들을 모두 풀고, 장보고의 부하들은 장보고가 대왕마마가 머무르고 있는 궁궐 안으로 다녀오는 동안 인화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글=최인호

그림=이우범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