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해외칼럼

정치적 목소리 내는 태국 서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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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불교국가 태국이 왕실의 자비와 축복, 대기업들의 관용을 바탕으로 상호 배려와 조화로 다져진 ‘미소의 나라’란 사실은 신화에 가깝다. 하층 계급은 턱없이 부족한 사회복지에도 만족할 정도로 순종적이다. 빈곤층과 군부는 모두 왕실을 숭배한다. 왕실 직원과 시골 사람들이 왕족에게 무릎을 꿇는 것은 단순한 의전 차원이 아니라 진심 어린 사랑과 존경에서 우러나온 행위다.

탁신 친나왓 전 총리에게 충성하는 붉은 셔츠 시위대는 비즈니스 중심 지역에 진(陣)을 치고 나라 경제의 중요 부분을 마비시키고 있다. 그들은 즉각적인 의회 해산과 선거로 선출되지 않은 아피싯 웨차치와 총리의 사임을 요구하고 있다. 여전히 많은 사람은 현재의 위기가 지나가고 네 집단 사이의 조화가 회복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 같은 관측은 태국의 새로운 정치 역학을 무시한 것이다.

무엇보다 태국의 하층 계급은 이제 복종은 과거의 일이라고 규정한다. 그들은 현상 유지 정책에 분노한다. 탁신 재임 기간을 제외하면 그들은 지난 30년간의 경제 성장으로부터 거의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했다. 도시 부유층과 나머지 서민들 간의 메울 수 없는 격차는 해를 더할수록 더 심해졌다. ‘트리플 다운(상류층의 부가 흘러넘쳐 빈곤층에까지 전파되는 현상)’ 효과도 태국에선 일어나지 않았다.

세련된 수도 방콕의 상업지구에서도 몇 발짝만 벗어나면 포장이 파인 채 방치된 도로와 쓰레기 더미, 그 사이를 오가는 쥐 떼를 목격할 수 있다. 이처럼 부실하기 짝이 없는 인프라가 한때 아시아의 잠룡(潛龍)으로 불렸던 태국 경제의 현주소다. 부유층은 냉방장치가 완비된 주택에 살며 운전기사가 딸린 차로 여행을 하고, 세계적 명품 브랜드가 즐비한 초현대적 쇼핑몰에서 지갑을 연다. 하지만 나머지 태국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선 전혀 의식을 못하고 있는 듯하다. 가난한 농민들은 그들의 자녀가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도시에서 몸을 팔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 살고 있다.

서민들은 탁신을 축출한 2006년의 쿠데타를 지배층 엘리트들의 복수로 생각한다. 탁신 옹호 세력인 붉은 셔츠 시위대가 탁신의 부패에 눈을 감고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탁신이야말로 자신들의 편이 되고자 노력했던 거의 유일한 정치인이라 믿고 있다. 실제로 탁신은 총리 시절 하층민이 간절히 원했던 의료 보장과 소자본 융자 혜택을 제공했다.

탁신은 빈곤층에 정치적 이익을 추구하라고 촉구했다. 근시안적이고 거만한 태도가 몸에 밴 전통 엘리트들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그들이 달라지지 않는 한 태국의 미래는 점점 더 어두워질 것이다.

신밍쇼 전 옥스퍼드대 연구원
정리=예영준 기자 ⓒProject Syndica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