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에 사는 어느 탈북자의 기막힌 사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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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중앙지난해 4월 미국정부로부터 난민지위를 인정받아 영주권을 취득한 탈북자 정춘식(가명·50)씨. 그는 LA한인타운의 방 두칸짜리 아파트에서 룸메이트와 함께 살고 있다. 두 평 남짓한 그의 방에는 침대 메트리스가 한 켠에 세워져 있었고 이불이 바닥에 깔려 있었다.

정씨는 스스로 개발한 레시피를 이용해 건강식 만두를 만든다. 중국에서 배운 만두 만드는 기술은 그가 아직 '아메리칸 드림'을 포기 못하는 이유다.<김상진 기자>

“땅에서 자는 게 오히려 익숙하고 편합니다.” 메트리스가 오히려 불편하다는 그의 잠자리 머리맡에는 영어 알파벳을 한글로 써놓은 종이와 예수가 담긴 성화가 빨간색 테이프로 붙여져 있었다. 간경화에 걸렸던 그의 아내는 약을 제대로 먹지 못해 1998년 사망했고 정씨가 중국에서 돈을 버는 동안 홀로 남겨졌던 13살짜리 외동딸은 중국공안에 적발된 그가 옥고를 치르고 나와보니 실종돼 버렸다. 정씨는 결국 딸을 직접 만나지 못했고 죽었다는 소식만 나중에 전해 들었다. 함경북도 나진에 살던 그가 자유를 찾아 탈북한 지 5년 만에 LA에 도착한 사연은 한 편의 영화보다 더 영화같다.

#생사를 건 탈북

중국에서 돈을 벌다 공안에 적발돼 북송되기를 수차례 거듭한 김씨는 결국 중범들만 가는 청진 수용소로 이송이 결정됐다. 그 곳에 끌려가면 사형아니면 석방돼도 사람구실을 못한다는 악명높은 곳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탈출의 기회가 왔다. 언덕을 넘던 호송차량의 타이어가 펑크나자 죄수들 중 나이가 많아 도주의 우려가 적다는 이유로 김씨가 호출된 것이다.

“뒤로 밀려나는 차량을 세우기 위해 돌을 구해오라 하더라고요. 그 틈을 타서 절벽으로 뛰어 내렸죠. 등 뒤에서 총알이 막 날아왔지만 어차피 죽을 목숨, 그냥 무조건 도망쳤습니다.”
그 길로 몇날 며칠을 걸어 두만강을 건넜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아닌 다짐과 함께. 그 때가 2003년이었다.

#미국행을 결심하다

탈북자들이 많이 사는 연길에 터전을 잡고 식당에 취직해 만두를 만들었다. 사장이 연길시 고위 공무원이라 공안들의 단속도 미치질 않았다. 하지만 중국정부의 탈북자 단속이 강화되고 1명당 300위안씩 포상금을 준다며 신고를 독려하는 터에 어쩔 수 없이 중국탈출을 결심했다. 한국을 가려했다. 하지만 한국에 가면 같은 피를 나눈 동포들이 오히려 죄인취급하고 멸시한다는 소문을 듣고 포기했다. 그러던 차에 미국에 먼저 가있던 친구와 연락이 닿았다.

자신을 미국으로 데려가겠다는 것이다. 친구가 보내준 브로커를 믿고 무작정 남쪽으로 이동해 운남에 도착했다. 그 때가 2006년 8월이었다. “중국을 떠날 기회가 여러번 있었습니다. 하지만 딸이 아직 북한 어딘가에 살아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에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더군요.(그는 딸 얘기만 나오면 눈시울을 적셨다.) 그러나 단속이 심해져서 어쩔 수 없이 도망쳤습니다.”

#지구 반대편에 가다

운남에서 위조된 한국여권을 받았다. 무사히 국경을 넘어 베트남으로 갔고 거기서 한동안 대기했다. 다시 작은 배의 화물칸에 타고 태국 남부 지역으로 이동했고 싱가폴까지 숨어 들어갔다. 경찰당국의 단속을 피해 치밀한 작전을 세우고 움직였다.

정씨는 "항상 '어떤 모텔 몇 호실에 들어가서 몇 시쯤 걸려오는 전화를 받아라'라는 지령을 받고 이동했다"면서 "그러면 그 전화에서 다음 행선지를 알려주는 식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싱가폴에서 아르헨티나행 비행기를 탔다. 도착하면 누군가 마중을 나올 것이란 말만 믿고 지구 반대편으로 왔다.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인근 국가인 파라과이로 이동했고 다시 비행기를 타고 멕시코 제2의 도시인 과달라하라에 도착했다.

이 곳에서 만난 브로커는 그를 인근 한인마켓앞에 그를 내려놓고 그만 가버렸다. 중국을 떠난 지 2달이 지난 때였다.

#동포에게 노예살이

한인마켓 주인에게 자신의 사정을 설명했다. 탈북했으며 친구가 있는 LA에 가야한다고.

다행히 '맘씨 좋은' 주인이 호의를 배풀어줬다. 국경을 넘을 수 있도록 사람을 찾아 볼테니 당분간 안전한 곳에 피해 있으라는 것이었다. 그가 제공한 차를 타고 8시간을 이동해 시골로 갔다. 주인이 운영하는 농장이 있었다. 그 곳에서 밀입국 브로커를 찾을 때까지 정씨는 노동을 했다.

하지만 몇 주일이 지나고 몇 달이 지나도 그 주인은 감감 무소식이었다. 주변 지리를 모르고 언어도 통하지 않아 탈출은 꿈도 못꿨다. 무엇보다 여기를 나가면 잡혀간다는 주인의 경고가 정씨의 용기를 빼앗아 갔다. 그러다 1년 반이란 세월이 흘렀다. 우연찮게 같이 일하던 멕시칸이 한국말을 대충 알아 들었다. 10년 간 LA한인타운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그에게 미국 밀입국을 도와달라고 했다.

#마침내 자유

농장에서 나가겠다고 주인에게 밀린 임금을 요구했지만 결국 20달러를 받는데 그쳤다. 먹여주고 보호해줬는데 무슨 돈 타령을 하냐고 오히려 호통만 들었다. 밀입국 목적지는 텍사스였다. 40명 정도되는 라틴계 사람들과 함께 철조망을 넘었다. 몇시간을 걸었을까 어디선가 갑자기 국경 수비대가 나타났다. 모두들 사방으로 도망쳤다. 정씨도 수비대를 피해 달아났다. 북한에서 총알을 피해 탈출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잡히면 죽는다'.

하지만 다리가 허공에 붕 뜨더니 몸이 구덩이의 물속으로 그만 빠져 버렸다. 오히려 잘됐다 싶어 그 속에 3시간을 숨어 있었다.

수비대가 철수한 후 밤새 걸어서 인근 주유소를 찾아 갔다. 그는 멕시코에서 벌은 20달러와 함께 친구 전화번호를 점원에게 건넸다. 마침내 자유를 향한 정씨의 길고 긴 여행이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었다.

#현실

LA의 친구와 북한인권전문가 수잔 솔티 여사의 도움으로 정씨는 난민지위를 인정받고 영주권도 취득했다. 만두 만드는 기술도 있어 LA한인타운 한 중식당에서 주방보조로 일도 했다.

하지만 어느날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했고 직장도 그만둬야 했다. 정씨는 오늘도 만두를 빚는다. 인근 지인들이 일부러 그를 돕기 위해 만두를 팔아 준다.

"아직 안정된 직장을 구하지 못해 사는 게 많이 힘듭니다. 타코트럭 같은 걸 하나 구할 수만 있으면 만두를 팔고 싶은데…하지만 마음껏 숨쉴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모르겠습니다. 미국정부와 도와 주신 모든 분들께 너무 감사합니다."

LA정착한 정승진씨는…

중국에서 만두기술을 배웠던 그는 LA한인타운 내 중식당에서 주방보조로 일했지만 교통사고를 당한 후 직장을 그만뒀다. 완쾌 후 다시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으나 불경기의 여파로 어려운 상황. 최근 가정에서 만두를 만들어 지인들에게 판매해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미주 중앙일보 신승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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