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영준 특파원 난민촌 르포] "빈 라덴 넘겨 줬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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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언제 공격이 시작될지는 몰랐지만 불안해 견딜 수 없었다. 무작정 아홉살 난 딸을 업고 국경을 향해 달렸다."

잘랄라바드 시민 살다르 발완싱(33)은 미국의 공격 이틀 전인 5일 고향을 떠나 가까스로 파키스탄에 도착했다.

국경은 차단돼 있었지만 소수부족 자치지역을 통해 들어왔다가 미국의 공격이 시작됐다는 소식을 듣고는 "목숨만은 건졌구나"하는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여전히 고향에 남아 있는 가족들의 안부가 걱정되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 발완싱에게 "왜 탈레반의 성전에 동참하지 않고 피란왔느냐"고 물었더니 예상치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사람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 어디 있나.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오사마 빈 라덴을 인도했다면 아무 잘못없는 시민이 희생당하지는 않았을텐데…."

국경에서 15㎞ 거리에 있는 파키스탄 북서부 샴샤투 난민수용소에서 만난 아프가니스탄 난민 부리 바이(52.농업)도 비슷한 생각이다.

그는 5명의 가족을 데리고 열흘 동안, 그것도 밤에만 고산준령을 넘어 지난 2일 파키스탄에 도착했다. 바이의 고향은 타지키스탄에 가까운 농촌마을 다하르. 북부동맹과 탈레반의 전투지역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탈레반도, 북부동맹도 모두 싫습니다. 그들이 싸우는 통에 주민들만 피해를 보고 있어요. 가뜩이나 가뭄이 들어 먹을 것도 모자라는데…."

그는 "미국의 공격을 환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루 빨리 아프가니스탄이 평화를 되찾고 고향에 돌아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파키스탄에서 만난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지켜주지 못하는 탈레반 정권에 대해 강한 불만을 품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아프가니스탄 난민들 가운데엔 "미국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적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탈레반을 지지한다"고는 하지 않았다.

전쟁과 내전에 찌든 땅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에게 그곳은 평화는커녕 생명조차 보장해주지 못하는 곳이 됐다.

샴샤투 난민촌(파키스탄)=예영준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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