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 대기자의 투데이] 빈 라덴의 최면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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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두샨베에서 만난 국립 타지키스탄대학 법과대학생 두명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이 길게 끌어 테러와 관계없는 이슬람교도들이 많이 희생되면 테러와의 정의로운 전쟁이 자칫 기독교와 이슬람간의 문명의 충돌로 발전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클린턴 대통령의 부(副)안보보좌관을 지낸 제임스 스타인버그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부시 대통령의 아프가니스탄 공격이 확실한 진입과 퇴출의 전략 없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스타인버그의 말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폭격이 미국이 해외에서 군사적인 행동을 할 때는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압도적인 군사력을 한꺼번에 투입해 단기간에 목표를 달성하고 신속하게 철수한다는 파월 독트린에 맞지 않는다는 의미다.

*** 유탄 맞는 이슬람교도들

스타인버그의 말이 옳다면 타지키스탄대학생들의 걱정이 현실로 나타날 수도 있다.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은 탈레반정권에 대한 단기적인 응징으로 끝나지 않고 빈 라덴의 테러조직을 궤멸시킬 때까지 장기전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민간인 희생자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한다고 해도 유탄(流彈)을 맞는 선의의 희생자가 나올 것이다.

부시 대통령도 미국과 국제사회의 반테러 전쟁을 문명의 충돌로 몰고 가려는 오사마 빈 라덴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탈레반정권과 아프가니스탄 국민, 그리고 빈 라덴과 그 밖의 무슬림을 분리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부시 대통령이 개전을 알리는 연설에서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국민의 친구요 10억 무슬림의 친구라고 선언하고, 고통받는 아프가니스탄 국민에게 식량과 의약품을 공중투하하겠다고 발표한 것도 무슬림의 단결을 호소하는 빈 라덴의 선동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부시 대통령은 9월 11일 미국에 대한 테러공격 이후 한달 동안 테러 응징을 위한 군사행동을 미루면서 국제사회의 지지를 모았다. 그런 노력의 결실로 40개국 이상의 지지와 지원 약속을 확보했다. 그러나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과 타지키스탄을 제외한 이슬람국가들의 호응이 냉담한 게 부담스럽다.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우즈베키스탄과 타지키스탄은 국내의 친탈레반 세력 내지는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의 반란으로 정치적인 불안을 겪고 있는 나라들이다. 타지키스탄은 1992년부터 97년까지 5년의 내전(內戰)까지 치렀다.

타지키스탄의 친공산계가 탈레반의 지원을 받는 이슬람원리주의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던 것은 우즈베키스탄의 이슬람 카리모프 대통령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어서 가능했다.

우즈베키스탄의 페르가나 분지는 중앙아시아의 과격한 이슬람 운동의 발상지요 메카다. 우즈베키스탄의 정치가 안정되면 중앙아시아 전체가 조용하다.

우즈베키스탄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는 미국에 군사기지를 제공하는 것은 반드시 경제적인 반대급부만를 위해서가 아니다.

빈 라덴의 테러조직이 궤멸되고 탈레반 정권이 친러시아.친우즈베키스탄.친타지키스탄 북부동맹 정권으로 교체되면 카리모프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안정된 중앙아시아 5개국의 맹주 노릇을 할 수 있다.

타지키스탄은 정치안정과 경제적인 아프가니스탄 특수(特需)로 만족이다.

중앙아시아의 유일한 핵 보유 국가인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은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지 않아서 직접적인 발언권이 없고 투르크메니스탄은 아프가니스탄의 서쪽 이웃이지만 국경을 넘어 오는 난민을 최소화하는 것 말고는 지역문제에 관심이 없다.

*** 카리모프 中亞 맹주 노려

이란과 이라크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을 비난하고,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아랍국가들이 미국 지지와 지원을 망설이는 가운데 전쟁이 장기화하면 카리모프와 티지키스탄의 이마몰리 라프마노프 대통령의 낙관적인 시나리오는 존립기반을 잃게 된다.

빈 라덴이 도주를 계속하면서 무슬림의 지하드(聖戰)를 독려하면 테러리스트 아닌 무슬림들이 최면에 걸릴 수도 있다. 문명충돌의 기치를 든 이슬람 원리주의자들과 빈 라덴 같은 테러리스트들은 그런 허점을 노릴 것이다.

백인우월주의의 발상이라고 비판받던 헌팅턴의 문명충돌의 가설이 테러리스트들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은 아이러니지만 전쟁이 오래 끌면 빈 라덴의 간지(奸智)와 관계없이 21세기의 첫 전쟁은 문명충돌의 성격을 띨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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