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 (9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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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91. 성전암 10년 칩거

성철 스님의 수행 중 가장 치열하면서도 오랫동안 계속된 정진은 단연 대구 파계사 부속암자인 성전암에서의 칩거 10년일 것이다. 성철 스님은 당시 격동하던 불교계의 흐름을 외면하고, 성전암 인근에 가시 울타리를 쳐 스스로를 외부와 단절시킨 가운데 길고 긴 정진에 몰입했다. 당시 큰스님을 모시는 고생을 감내한 분 역시 법전.천제 두 스님이다. 천제 스님의 기억.

"1954년에 불교정화운동이 막 시작되었을 무렵, 한국불교를 누구보다 많이 걱정하던 청담 스님이 성철 스님에게 정화운동을 같이 하자고 권했지요. 그렇지만 성철 스님은 '그 일은 청담 스님에게 맡긴다'며 정중히 사양했습니다. 불교행정에 관한 일은 청담 스님에게 맡기고, 성철 스님 본인은 수행에 전념하겠다는 뜻이었지요."

성철 스님의 개혁은 오히려 더 근본적이고 철저했다. 성철 스님은 "절 재산을 모두 사회에 내주고 승려는 걸식하며 수행하는 데만 힘써야 한다" "정화란 안으로부터 정진력을 키우는 내실을 기하면서 이루어져야지, 자기 편을 늘려 사찰을 뺏는 싸움을 벌이는 식이 되면 '묵은 도둑 쫓아내고 새 도둑 만드는 꼴'이 된다"는 입장이었다. 그런 생각에 따라 보다 철저한 수행과 정진의 전범을 직접 실천해 보이고자 한 것이다.

이런 자세에도 불구하고 성철 스님의 법명이 널리 알려지자 조계종에서는 55년 일방적으로 성철 스님을 해인사 주지에 임명했다. 이 무렵 성철 스님은 천제굴에서 나와 해인사로 가지 않고 파계사 부속 성전암으로 들어갔다. 성전암으로 옮길 당시의 사정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원로회의 의장인 법전 스님이다.

"천제굴에서 성전암으로 옮길 때는 내가 다 했지요. 그때 성전에 집이 있기는 있었는데, 다 헐고 썩어서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집을 새로 지은 후에 성철 스님을 모셔왔지. 큰스님은 그 곳에서 10년이나 칩거하면서 수행자의 참모습을 확립했습니다."

법전 스님은 집을 다 지어 성철 스님을 모시고는 이곳 저곳을 떠돌며 수행에 전념했다. 대신 성철 스님을 곁에서 모신 사람이 천제 스님이다.

"성철 스님은 수행자의 본모습에 충실하기 위해 먼저 암자 주변에 가시 울타리와 철조망을 둘렀고, 세속의 각종 요청을 일절 거절했습니다. 해인사를 둘러싸고 비구(독신).대처(결혼한 승려) 스님들이 싸우면서 서로 성철 스님을 주지로 모시려고 했는데, 큰스님은 '아직은 시절 인연이 아니다'며 완곡하게 거절했습니다. 나중에 조계종에서 일방적으로 해인사 주지에 임명하기도 했는데, 간곡한 사직원을 당시 종정 스님에게 보냈습니다."

설.추석.결제.해제를 전후하여 기도정진 날짜를 정하고 그 이외에는 신도들은 물론 스님들의 출입 또한 일절 금했다. 성전암의 문을 여는 날에도 일반 신도들의 경우 서울이나 부산 등 먼 곳에서 찾아오는 사람만 만나줬다. 가까운 대구에서 오는 사람이나 큰절에 적을 둔 사람들은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신도들과 얽힌 천제 스님의 기억 한 토막.

"뵙기 힘든 큰스님인데, 생신을 맞아 신도들이 조심스럽게 음식상을 차렸습니다. 성철 스님이 두 말없이 음식을 상째로 던져버리시는 거예요. 출가한 수행자는 육신의 생일이 의미가 없다는 것이죠. 그렇게 스님은 평생 생신상을 받지 않았습니다."

신도들을 그렇게 구박하니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절살림이 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렇게 인근 지역에 사는 신도를 멀리한 것이 성전암 큰절과 마찰 없이 10년을 살 수 있는 현실적 방편의 하나이기도 했다.

성철 스님은 성전암에 은거하면서 불교의 교리를 현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범어 원전을 보며 한문 경전과 비교.연구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불교학 교수들보다도 앞선 경전관(經典觀)을 보이기도 했고,불교철학과 연관된 물리학.수학 분야까지 파고들었다.

원택 <성철스님 상좌>

정리=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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