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외신 번역 신중히 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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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9월 20일 오후 9시 한국의 어느 TV 뉴스에 나온 그 방송사 워싱턴 특파원은 "항공모함 루스벨트호가 걸프만을 향해 출항했습니다" 라고 보도했다.

그리고 화면에는 '걸프만' 이라는 자막까지 나왔다. 또 9월 19일 한 일간신문은 "항공모함 루스벨트호 오늘 추가 파견, 美 걸프海 군사력 증강" 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 걸프만·걸프해 틀린 표현

이런 보도를 한 기자들은 '걸프' 가 고유명사인줄 아는 모양이지만, 걸프는 만(灣)이란 뜻의 보통명사에 불과하다.

'만' 이란 삼면이 육지로 둘러싸인 바다의 일부를 가리킨다. 영어로는 'gulf' 라고 한다(bay도 만이지만 gulf보다 작은 만을 가리킨다).

정확하게 하려면 걸프만이나 걸프해가 아니라 '페르시아만' 이라고 해야 한다(페르시아만은 쿠웨이트.이란.사우디아라비아에 의해 삼면이 둘러싸인 바다다).

9월 20일자 워싱턴 포스트지를 보면 같은 면에 'the Persian Gulf' 란 말이 세번 나오고 'the Persian Gulf War' 란 말도 두번 나온다. the Persian Gulf War는 물론 '페르시아만 전쟁' 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것을 줄여 the Gulf War라 하기도 한다.

이것을 한국 언론들이 '걸프 전쟁' 이라고 번역해 쓰고 있는데 만이란 뜻의 보통명사 걸프를 굳이 영어 발음 그대로 쓴 것을 보면, the Gulf War를 처음 번역한 사람이 Gulf를 고유명사인줄 알고 그렇게 번역하지 않았나 싶다.

위에 예로 든 워싱턴 포스트처럼 미국의 권위 있는 신문들은 the Gulf War란 말도 잘 쓰지 않는다. 한 단어가 더 들어가더라도 반드시 the Persian Gulf War라고 정확하게 쓴다. 우리 언론도 글자가 한두자 더 많더라도 페르시아만 전쟁이라고 하는 게 좋겠다.

미 국방부는 테러범들에 대한 이번 작전을 'Operation Infinite Justice' 라고 불렀다가 나중에 'Enduring Freedom(영원한 자유)' 로 바꿨다. 전자를 한국 언론들은 '무한 정의 작전' 이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이것은 영어의 뜻을 그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영어 명칭은 "테러범들을 무한정 추적해 응징하는 작전" 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차라리 '무한 응징 작전' 이 더 나은 번역이다. infinite는 시간과 장소를 한정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justice는 '사법 정의' , 즉 '죄인을 심판해 처벌' 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Department of Justice를 정의부(正義部)라 번역하지 않고 법무부라고 번역하는 것이다.

부시 대통령은 9월 20일 밤 의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Whether we bring enemies to justice or bring justice to our enemies, justice will be done." 이라고 말했다.

justice란 단어가 세번 나왔는데 앞의 둘은 법정이란 뜻이고 마지막 것은 사법 정의 또는 응징이란 뜻으로 쓰였다. 번역하면 "우리가 적들을 법정으로 끌고 오든지, 법정을 적이 있는 곳으로 끌고 가든지 간에 사법 정의(응징)는 실현되고 말 것" 정도가 된다.

*** 무한 '정의' 보다 '응징'으로

외신기사의 오역은 이밖에도 많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신문이나 방송에서 사용하는 말은 곧 모든 사람들이 따라서 사용하게 된다.

한두 사람의 실수 때문에 전 국민이 걸프만이나 걸프해 같이 무식한 말을 쓰게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외신기사 번역에 신중을 기해주기 바란다.

조화유 (재미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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