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8강전 - 마중지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2면

제9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8강전
[제8보 (113~126)]
黑. 최철한 9단 白.구리 7단

바둑판 361로는 한해를 상징하고 네 귀는 춘하추동 사계절을, 둘레의 72로는 72절후를 상징한다. 중국 후한의 역사가 반고(班固)의 해석이다. 그는 바둑판이 모난 것은 고요한 땅이요, 바둑돌이 둥근 것은 하늘을 상징한다고 말했다. 바둑판이란 너른 땅엔 여름이 성하고 겨울이 쇠하는 세월의 이치가 담겨 있다. 그 속을 움직여 나가는 천하종횡의 도가 바둑이란 의미다.

그러나 바둑판은 안개 자욱하고 첩첩이 마(魔)가 도사리고 있으니 이 미로를 종횡하기란 실로 쉽지 않다. 더구나 마중마라 할 최강의 장애물은 바둑판 위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 있다는 점이 문제다.

기막힌 수순으로 타개에 성공한 구리 7단은 잠시 화창한 봄날의 나른함에 젖어든다. 그는 116을 선수하고 120으로 머리를 내밀어 "이 정도면"하고 자축하고 있다. 스스로 생각해도 자랑스러운 수순이었다. 숨이 꽉 막혔던 중앙 백이 흑진을 붕괴시키며 살아났으니 이제 형세는 세어볼 것도 없이 백이 좋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 같은 안일함이야말로 언제나 비극의 씨앗이 된다. 이 안일함 속에서 무심히 던져진 120. 이 수는 당연히 '참고도'백1까지 진출해야 했다. 백A가 선수인 만큼 흑은 이 날일자를 끊지 못한다. 흑은 한 수 더 방비해야 하며 그때 B로 보강해 두면 좋았다. 이때라면 샴페인을 터뜨릴 만했다.

120을 본 최철한 9단이 한 마리 매처럼 121,123으로 덮어간다. 절호의 타이밍이다. 흑C는 항상 선수. 백 대마는 갑자기 집 한칸 없고 모양도 궁색한 곤마로 변했다.

박치문 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