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 (85)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85. 성철-청담의 의기투합

성철 스님과 청담 스님의 의기투합을 잘 말해주는 사례를 묘엄 스님이 기억하고 있다. 두 큰스님이 함께 경북 문경 대승사에서 수행할 당시 직접 보았던 일이다.

당시 대승사 선원(禪院) 앞에 큰 은행나무가 한 그루 버티고 서 있었다. 선방에 앉아 수행하던 성철.청담 두 스님은 그 나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야를 가로막아 가슴이 답답했던 탓이다. 두 스님이 "은행나무를 베어 버리자" 는 데 뜻을 같이 했다.

절 한가운데 크게 자리잡은 나무를 베려면 당연히 주지에게 허락을 받아야한다. 그런데 두 스님은 아무 의논이나 예고 없이 어디선가 톱 두 개를 준비했다. 어느날 점심시간에 다른 스님들이 모두 공양(점심밥)을 하러 공양간에 모인 사이 두 스님이 슬그머니 은행나무로 다가가 톱질을 시작했다.

대략 30분쯤 지나 집채가 무너지는 큰 소리를 내며 은행나무가 넘어갔다. 점심공양하다 말고 스님들이 놀라 밖으로 뛰어 나왔다. 그 굵고 우람한 은행나무가 마당에 넘어져 있는 것 아닌가. 그 옆에서 성철.청담 두 스님이 땀을 뻘뻘 흘리며 서 있었다. 근엄한 수행과 괄괄한 선풍으로 우뚝 선 두 스님이 한 일이니 다른 스님들이 뭐라고 얘기도 못하고 흩어졌다.

성철.청담 두 스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 선방으로 돌아가 좌복(참선용 방석)위에 앉았다. 한참 지난 시간, 밖에서 거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주지스님이다.

"나 이거 참, 차마 말할 수는 없지만…, 으음, 끙…. "

주지스님이 참선중인 두 스님에게 뭐라고 소리는 못지르고 혼잣말을 하면서 마당을 맴돌고 있었다. 묘엄 스님은 지금 생각해도 우스운가 보다.

"두 분 중에 아무나 나가 주지스님께 '주지스님, 미안하오. 선방에 앉아 있으니 은행나무가 앞을 가로막아 답답해서 베어 버렸으니 수좌(수도승)들을 위해 이해를 하소' 라고 한마디 하면 될 거 아닙니까. 그런데 두 스님이 모두 미동도 않고 앉아 있는 거예요. 그러니 주지스님이 점점 화가 더 치밀지만 어쩔 수는 없고 그날 오후 내내 계속 마당만 뱅뱅 돌았지요.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해요. "

그렇게 두 스님이 호기롭게 수행하던 중 8.15해방 소식이 들려왔다. 산중 스님들 사이에 새로운 시대에 맞는 불교수행의 방안에 대한 논의가 분분했다. 당시 해인사에서도 효봉 스님을 중심으로 총림을 운영한다는 논의가 있었다. 성철.청담 두 스님도 그 논의에 참가했다.

그러다가 성철 스님은 "공부하는 데 전념하겠다" 는 생각에서 불교개혁과 사찰운영과 같은 세속적인 문제들을 모두 청담스님에게 맡기고 양산 통도사 말사인 내원암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해(1947년) 가을 경북 문경의 봉암사로 거처를 옮겼다. 성철 스님의 나이 36세, 선방 수좌들 사이에서 한창 그 명성이 높던 무렵이다. 한국불교의 정초를 놓은것으로 유명한 '봉암사 결사' 시대가 열린 것이다. 성철 스님이 83년 법문에서 봉암사 결사에 대해 회고하면서 한 얘기.

"지난 얘기를 하나 해보겠습니다. 딴 것이 아니고, 예전 봉암사에 살던 얘기입니다. 요새 와서 봉암사 살던 일을 묻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또 지금 봉암사에서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이 일부러 와서 묻기도 합니다.

그때 봉암사에서 여럿이 함께 살긴 살았지만 내가 주동이 됐으므로 내가 그 이야기를 인제서야 하기는 곤란하지만 여럿이 물어보길래 조금 이야기하겠습니다. "

당시 백련암에 있던 성철 스님을 찾아온 많은 사람들이 봉암사 결사를 묻곤 했다. 그래서 성철 스님이 법문 중 당시 상황을 설명한 것이다.

"봉암사에 들어가게 된 근본 동기는 청담 스님하고 자운 스님하고 또 우봉 스님하고 나하고 넷이서 마음이 맞아선데, 그러니까 우리가 근본 방침을 어떻게 세웠느냐 하면,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일시적인 이해관계를 떠나 오직 부처님 법대로만 한번 살아보자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은 고치고 해서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 , 이게 우리들의 원(願)이었습니다. "

원택 <성철스님 상좌>

정리=오병상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