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4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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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제2장 신라명신

840년 2월 17일.

엔닌은 당시 장보고의 총본부가 있던 청해진(淸海鎭)을 거쳐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장보고의 부하였고, 훗날 청해진에서 병마사(兵馬使)를 지낸 최훈(崔暈)에게 편지를 전한다. 엔닌이 전한 편지는 장보고에게 쓴 편지로 이를 최훈을 통해 장보고에게까지 직접 전해지기를 원했던 것이었다.

그 당시 장보고의 위상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인 엔닌이 장보고 대사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삼가 만나뵈옵지는 못하였지만 오랫동안 높으신 이름을 들어왔기에 흠모의 정은 더해만 갑니다. 봄은 한창이어서 이미 따사롭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대사님의 존체거동에 만복하시기를 비옵니다. 이 엔닌은 멀리서 인덕을 입사옵고 우러러 받드는 마음 끝이 없습니다. 엔닌은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당나라에 체류하고 있습니다. 미천한 몸 다행스럽게도 대사님의 본원의 땅(장보고가 세운 절 적산법화원)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감사하고 즐겁다는 말 이외에 달리 드릴만한 말이 없습니다. 엔닌이 고향을 떠나올 때 엎드려 지쿠젠(筑前)의 태수(太守)의 서신 한통을 부탁받아 대사께 전해 올리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배가 얕아 갑자기 바닷속으로 가라앉아 물건들은 다 떠내려가고 그 때 대사께 바칠 편지도 물결 따라 흘러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한 맺힌 마음 하루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기이하게 생각하셔서 책망하지 마시옵소서. 언제 만나뵈올는지 기약할 수 없습니다만, 다만 대사를 경모하는 마음 날로 깊어갈 뿐입니다. 삼가 글을 올려 안부를 여쭈옵니다. 이만 줄이옵니다. 삼가 올립니다. "

엔닌은 이 편지에서 자신을 '일본국구법승전등법사위원인(日本國求法僧傳燈法師位圓仁)' 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760년 일본에서 제정된 승위 중 제4위에 해당하는 계위로서 엔닌이 일본의 불교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미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엔닌은 이 편지를 보내는 당사자인 장보고에 대해서 이렇게 표기하고 있다.

"청해진 장대사 휘하근공(淸海鎭張大使麾下謹空)"

'청해진 장대사' 는 장보고를 가리키는 존칭으로 그 편지의 내용을 통해 엔닌이 장보고를 어려워하고 존경하였음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편지의 내용을 보면 엔닌이 고향을 떠날 때에 당시 지쿠젠의 태수가 장보고에게 편지를 보냈던 것이 사실인 것 같다. 그 당시에 태수의 이름은 오노(小野末嗣)로서 이를 통해 일본에서 당나라를 건너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청해진 대사였던 장보고의 영해를 건너지 않고서는 불가능하였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피워 물었다. 다 마신 캔 커피를 쓰레기통에 던져넣고 가쁜 숨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심호흡을 하며 생각했다.

.그 당시 장보고는 바다의 영웅이었다. 바다를 지배하던 바다의 신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확신에 가득 차서 소리내어 중얼거렸다.

.폭풍우를 만나 기도를 하던 엔친 앞에 나타난 신라명신의 실체가 누구인가는 자명해진 것이다.

물론 장보고는 846년에 비참하게 죽었다. 엔친이 당나라에서 돌아올 때는 858년 6월. 12년의 시차가 있지만 이미 장보고는 죽음으로써 해신이 되어 바다의 신으로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치 선묘가 죽어서 해룡이 되어 여신으로 부활할 수 있었듯이.

- 그렇다.

장보고야말로 신라명신, 바로 그 사람인 것이다. 엔친 앞에 나타나서 '나는 신라명신이다. 앞으로 나는 너의 불법을 호지해줄 것이다' 라고 말하였던 신라명신은 바로 장보고의 현신인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방금 미데라의 금당에서 외부인으로서는 사상 최초로 친견하였던 그 신라명신의 모습은 바로 1천2백년 전에 죽은 장보고의 초상인 것이다.

글=최인호

그림=이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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