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3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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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제2장 신라명신

뭔가 있다.

나는 한적한 행길을 따라 빠르게 걸어가면서 생각하였다.

뭔가 있다. 분명히 뭔가 있는 것이다.

사상 최초로 외부인에게 공개된 비불. 신라명신의 모습에는 분명히 무슨 비밀이 숨어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리고 또한 신라명신은 도대체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 것일까.

858년 6월. 폭풍우가 몰아치는 난파당하기 직전의 배 위에서 나타난 신라명신은 도대체 누구인가. 엔친이 만났던 신라명신은 바다의 신, 즉 해신인 것이다.

그러나 무릇 모든 신화 속에 나오는 신들은 살아 있던 사람들이 화신(化神)이 되어 나타나는 법. 그러므로 스스로를 '나는 신라명신이다. 나는 이제부터 그대의 불법을 호지해줄 것이다' 라고 말하였던 신라명신의 실제 모델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신라명신의 실제 모델이 없다면 엔친이 만난 신라명신은 한갓 유령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 순간.

깊은 상념에 빠져 길을 걷는 내 머리 속에 문득 몇 년 전 교토시에서 가까운 고잔지(高山寺)에서 본 아름다운 여신(女神)의 모습을 떠올렸다.

중세 가마쿠라(鎌倉) 초기의 작품으로 알려진 이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은 정밀한 학술조사 결과 신라의 여신상으로 판별되었고, 그 이름이 마침내 선묘(善妙)로 밝혀지게 된 것이다.

목각으로 빚어진 그 여신상은 발견되자마자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그 이후부터 화엄불교(華嚴佛敎)를 수호하는 여신으로 숭배되고 있었는데, 신라의 여인 선묘가 이처럼 일본에서 화엄불교의 수호신으로 자리매김한 데에는 숨겨진 사연이 있는 것이다.

송나라의 초기 찬녕(贊寧)이라는 사람이 지은 『송고승전(宋高僧傳)』에는 '의상전(義湘傳)' 이 나오고 있다. 의상은 진평왕 47년(625년)에 태어나 성덕왕 원년인 702년에 죽은 대표적인 신라 고승으로 우리나라 화엄종의 개조인 것이다.

일찍이 원효(元曉)와 함께 당나라에 가려 했다가 고구려 군사들에게 첩자로 몰려 수난까지 당하였던 의상은 마침내 661년 귀국하는 당나라 사신의 배를 타고 중국으로 들어가는데 성공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에 들어가 등주에 머무르고 있을 때 아침 저녁 탁발에 나선 의상의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한 소녀가 있었던 것이다. 이 소녀의 이름은 선묘.

의상이 나타날 때마다 선묘는 정성을 다해 의상을 섬겼으며, 사랑을 고백했던 것이다. 그러나 젊은 의상의 마음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이러한 의상에 대한 선묘의 사랑을 찬영은 『송고승전』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드디어 선묘는 의상의 발 아래 무릎을 꿇고 생생세세(生生世世) 불법에 귀명(歸命)할 것을 눈물로 맹세했던 것이었다. "

마침내 의상은 장안의 종남산(終南山)에서 지엄삼장(智儼三蔣)을 만나 8년 동안 화엄사상을 전수받고는 669년 신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이때 선묘는 언젠가는 의상이 돌아오리라 일심전념으로 부처님께 빌고 있었는데, 의상이 신라로 돌아가는 배를 타기 위해 선창가로 갔다는 말을 들은 선묘는 미친 듯이 부두로 달려간다.

그러나 의상이 탄 배는 이미 바다 멀리 사라져가고, 이때 선묘는 들고 있던 상자를 바다 속으로 내던졌다던가. 상자 속엔 언젠가 반드시 돌아올 의상을 위해 정성을 다해 만들어 놓았던 법복이 들어 있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그리고 또한 풍랑이 이는 바다 속을 향해 선묘도 몸을 함께 던졌다고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선묘의 어린 넋은 바다의 용(龍)이 되었다. 서해의 거친 파도로부터 이 바다의 용은 의상의 안전을 지킨 수호신이 될 수 있었으며, 의상이 신라로 돌아와 화엄불교를 펼 때에도 많은 무리들이 이를 방해하자 선묘의 넋은 사방십리의 큰 대반석이 되어 공중에 떠서 소승(小乘)의 무리들을 쫓고 의상의 수호신이 되었던 것이었다.

선묘의 이러한 설화는 '공중에 뜬 돌' 이라는 이름의 부석사(浮石寺)에 오늘도 남아 있는 '선묘정(善妙井)' 이라는 우물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또한 일본의 고잔지에 남아 있는 국보인 목조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글=최인호

그림=이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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