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동네] 조각 '밭' 인가, 공원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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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3면

"한국의 문화적 전통은 이제 동아시아에서는 특유한 조각공원의 탄생으로 더욱 풍부해졌다. "

1988년 '올림픽 조각공원' 조성을 주관했던 국제위원회의 자화자찬이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문화적 자부심과는 하등 무관한, '입에 발린' 거짓이었음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자주 세계주의로 오해되거나 포장돼 왔지만 사실은 외국으로부터 인정받으려는 기묘한 간절함과 그 저변의 열등의식이 빚어낸 결과였다.

23만평의 부지와 72개국 2백5개의 조각을 앞세운 물량주의, 세계 제5위의 조각공원을 내세우는 콤플렉스, 그리고 잠시 남아 돌아간다고 착각했으므로 애써 쓸곳을 찾아야 했던 돈으로 싸발랐던 우리의 민망한 자화상이었다.

그러나 IMF로 사회 전체가 곤두박질치는 동안에도 허영기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한번 길들여진 악습은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조각공원은 여전히 과시적인 관료행정과 눈먼 재정지출, 그리고 창작보다 셈에 더 밝은 '작가들' 에게 깊이 연루된 타락한 문화사업이다.

예컨대 '지역문화의 해' 같은 전시행정이 각 지자체들로 하여금 갑작스레 조각공원 하나쯤은 만들도록 유도하지만, 그 '사업' 은 '그깟 것 하나 만들면 그만' 이라는 식으로 진행된다. 이 가련한 공원을 예견된 실패로부터 건져낼 엄격한 기준 따위는 애초에 없다.

이같은 출발은 그것을 단지 몇몇 조각가들의 의례적인 수입 올리기 따위로 굴절시키는 미술계의 관례와 기막히게 결탁한다.

다음 단계는 이 '수월한' 문화사업의 위로 붕붕 날아다니던 돈다발이 관이 위촉한 위원회나 커미셔너와 친분이 깊은 작가들 앞에 툭하고 떨어지는 것이다. 물론 뒤탈이 없도록 유명한 작가 몇명은 반드시 명단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구색을 맞추는 일도 중요한데 예컨대 지역의 조각공원이라면 해당 지역작가의 '복권' -선정되면 복권맞는 것과 같다-을 남겨놓아야만 한다.

조각공원, 우리가 이제껏 만들어 온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진정 공원이었나? 정작 그것이 위치할 곳의 역사와 상황에 무감하고 삶에 냉소적이며, 잔뜩 전문용어로 치장했지만 실상은 고철덩어리와 진배없는 것들의 수상쩍은 집합장소에 불과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각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실천은 거의 없었다.

대다수의 조각공원들은 관례에 따라 조각품의 명단을 작성하고, 그것들을 확보된 부지에 적당히 꼽는 이른바 '조각밭' 의 수준을 맴돌아 왔다. 국제조각공원의 성패는 얼마나 외국의 저명하신 작가들을 모셔오는가에 의해 평가됐다.

그러는 동안 우리 사회와 미술은 정말 우리 삶과 우리의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조각공원을 고민할 겨를이 없었다.

"예술은 힘이 아니지만, 우리의 삶에 하나의 위로일 순 있다. " (토마스 만) 더군다나 조각공원의 고민은 그곳으로 발길을 옮길 사람들의 위로받을 권리로부터 촉발되어야만 한다.

삶의 우둔함을 교훈하는 거만한 조각품들이 사방에 널린 공원, 신성불가침의 미술관 논리를 다만 공원에 이식해놓은 조각공원을 넘어서야 하는 이유가 이러하다.

심상용(동덕여대 교수 ·미술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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