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액션보다 인간에 앵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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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독일의 비평가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시(詩)가 가능한가' 라며 인간에 의한 인간의 대량학살 앞에서 느끼는 인간 정신의 초라함을 토로한 적이 있다.

조금 다른 맥락이지만 이번 미국의 대참변 이후에도 할리우드에서 테러.액션 영화가 가능할까. '영화보다 더 영화적인 현실' '현실이 영화보다 앞서가는 현실' 앞에서 그동안의 할리우드 액션 블록버스터 전략의 비인도적 측면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인들의 정신적 상처와 고통이 상당 기간 지속될 것임을 고려하면 이번 재앙을 상기시키는 테러.액션 영화를 제작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현재 캐나다 토론토영화제에 참석 중인 영국의 마이크 피기스 감독은 13일 "이번 테러 사건이 앞으로 폭력적인 이미지를 어떻게 다뤄야하는지에 대해 총체적인 영향을 미칠 것" 이라면서 "할리우드 영화의 제작 방식과 마인드에 획기적인 변화가 올 것" 이라고 전망했다.

징후는 벌써 나타나고 있다. 미국의 대형 영화사 워너브러더스는 '스워드피시' 의 극장 상영을 포기했다. 국내에서도 개봉됐던 존 트라볼타 주연의 '스워드피시' 는 로스앤젤레스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액션영화.

인간폭탄으로 유리로 된 인터내셔널 빌딩을 폭파하는 등 특수효과가 넘친다.

당초 영화를 상영하기로 했던 오데온시네마 측은 "워너브러더스가 영화를 걸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요구를 해 왔으며 우리도 전적으로 지지했다" 고 밝혔다. 워너는 이번에 붕괴된 뉴욕 세계무역센터에 다수의 사무실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콜럼비아영화사는 테러로 붕괴된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 사이에 펼쳐진 거미줄에 헬기가 걸리는 장면 등을 담은 '스파이더 맨' (내년 4월 개봉 예정)의 예고편을 전격 회수했다.

물론 이런 조치들은 피해자와 유족들을 애도하는 뜻이 강하다. 그러나 미국내의 분위기를 감안하면 향후 제작되는 영화들에도 이런 태도가 반영될 가능성이 높다.

1990년대 들어 할리우드는 특수효과와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대형 건물을 폭파하는 등 스펙터클한 볼거리에 의존하는 작품을 양산해 왔다.

이 과정에서 탄탄한 스토리나 인물 탐구는 포기됐다. '다이하드' '아마겟돈' '트루라이즈' '파이널 디시전' '터뷸런스' '콘 에어' '인디펜던스 데이' 등 근래 히트한 영화들에서 이런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1980년대 말 동구권이 붕괴된 이후 할리우드는 아랍 테러리스트를 가상의 적으로 삼고, 공간적 배경은 마천루가 즐비해 시각적 효과가 뛰어난 뉴욕 맨해튼 같은 곳을 선호했다.

그러나 앞으로 이런 영화들은 설자리가 없게 됐다. 1백10층짜리 빌딩이 맥없이 무너지는 장면을 망막에서 지울 수 없게 된 관객들에게 이보다 더한 시각 영상을 제공하기는 쉽지 않다.

대신 이번 참사에 따른 미국인들의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고 사건 당시의 정황을 재현해보려는 영화들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경우에도 건물의 폭파나 테러행위 자체를 보여주기보다 사건을 둘러싼 '인간' 에 초점이 맞춰질 가능성이 높다.

1,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뒤 만들어진 전쟁영화들이 주로 전쟁 자체를 재현하기보다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의 불안과 갈등에 초점을 맞춘 것과 유사한 이치다.

영화제작자 심재명씨는 "테러.액션영화는 그동안 할리우드가 주도했기 때문에 한국엔 별 영향이 없을 것 같다" 면서 "현실이 영화를 뛰어 넘어버린 상황에서 할리우드도 과거와 같은 테러.액션영화보다는 정신적 공황이 반영된 영화, 미래를 암울하게 그린 영화나 반대로 희망을 그리는 영화를 많이 제작할 것으로 보인다" 고 전망했다.

미국의 배우겸 감독인 숀 펜은 최근 "할리우드에는 영화에 세 가지 이상의 생각이 담기면 아무도 보지 않는다는 규칙이 있다" 며 일차원적이고 볼거리 위주로 흐르는 미국 영화를 비판한 적이 있다.

할리우드에 있어 이번 참변은 독(毒)이 아니라 약이 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하기에 따라 세계 영상산업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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